경북동해안 국가지질공원...유네스코 셰계지질공원 등재...포항 지질명소 즐비하다...호미곶 해안단구 구룡소, 흰디기, 달전 주상절리, 여남동 화석단지

▲ 민석규 박사 

올해 4월 10일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이 전국에서 6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세계지질공원에 포함된 포항의 지질명소로는 호미곶 해안단구, 구룡소, 흰디기, 여남동 화석산지, 달전리 주상절리, 분옥정, 내연산 12폭포 등 일곱 곳이다.

비록 세계지질공원의 지질명소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포항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흥해읍 오도리의 오도 주상절리, 나뭇잎 화석의 산지인 동해면 금광리 금광동층, 금광동에서 출토된 나무화석 등 우수한 지형·지질 자원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그중 구룡(호미)반도에 자리한 대보리에서 구만리에 이르는 해안단구는 세계지질공원에 속한 주요 지질명소다.

이번 글에서는 세계지질공원이자 전국적인 해맞이 명소로 사랑받는 호미곶 해안단구와 그 주변의 파식대, 시스택 같은 해안 지형의 지형·지질학적 의미와 이 지형들이 지역주민들의 삶과 역사, 문화에 끼친 영향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그림1 구룡반도 동쪽 해안과 서쪽 해안선 비교.

◇바람이 구룡반도 동서 해안의 지형적 차이를 초래하다
구룡(호미)반도 동쪽 해안에 대규모 해안단구가 발달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사계절 내내 동해에서 불어오는 동풍(샛바람)에 의해 발생하는 강한 파랑 때문이다.

이 동풍은 연중 지속적으로 구룡반도 동쪽에서 불어와 해안 침식 작용을 일으킨다. 이 지역에 분포하는 호미곶 층군과 장기층군은, 암석의 구조와 풍화 특성이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암석으로 다시 구분된다.

구만리-대보리-강사리-석병리-삼정리 해안을 따라 발달한 대규모 해안단구는 신생대 고 제3기의 강사리 각력암과 신생대 신 제3기의 연일 현무암, 두일포 안산암이 분포한다.

반면 구룡반도 서쪽 해안의 대동배2리와 구룡반도 동쪽 해안의 석병리는 동일한 신생대 고 제3기의 봉화응회암이 분포하지만, 해안단구의 발달 모습은 전혀 다르다.

동쪽 해안의 석병리는 폭이 대략 900m에 달하는 대규모의 해안단구가 발달했지만, 서쪽 해안의 대동배리는 해안단구의 발달을 확인하기 어렵다.

구룡반도 동쪽 해안의 해안단구가 암석의 종류와 무관하게 발달했다는 사실은 해안단구의 형성에 암석 차이보다 강한 파랑의 침식작용이 더 큰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한다.

구룡반도 서쪽 해안보다 동쪽 해안의 굴곡이 심한 것도, 동풍의 영향을 많이 받아 침식이 더욱 활발하게 진행됐기 때문으로 보인다(그림1).

▲ 그림2 파랑의 침식에 대비한 시멘트 옹벽과 테트라포트. 

◇구룡반도 주민의 삶터 해안단구(MarineTerrace)
바람과 파랑이 강한 호미곶구만리-대보리-강사리-석병리-삼정리-구룡포로 이어지는 구룡(호미)반도 동쪽 해안은 서쪽 해안과 달리 전국에서 가장 넓은 해안단구가 발달했으며, 대보항, 구룡포항과 같은 큰 만이 형성돼 있다.

단조로운 해안선을 이루는 호미반도 서쪽 해안과 지형적 특징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해안 지형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바람의 세기에 있다.

동해로 열려있는 구룡반도의 동쪽 해안은 사계절 내내 동해에서 불어오는 동풍과 북동풍의 영향으로 강한 파랑 침식작용이 일어난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대한 해협을 거쳐 동해상으로 진출할 때 북동풍과 함께 밀려오는 너울성 파도는 활발한 침식을 일으키고 해일 피해까지 초래한다.

아래 사진은 파랑의 침식으로부터 도로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대보리의 시멘트 옹벽과 테트라포트다. 이러한 구조물은 구룡반도 해안 곳곳에 설치돼 있으며, 호미곶 일대를 포함한 이 지역 해안이 파랑 작용이 활발한 환경임을 잘 보여준다(그림2).

▲ 그림3 구룡반도 해안단구의 형성과정.
▲ 그림3 구룡반도 해안단구의 형성과정.

◇파랑의 침식과 지각의 융기, 기후변화가 만든 해안단구
해안단구란 해안가에 자리한, 해수면보다 높은 계단 모양의 평탄한 지형을 의미한다. 산지가 해안 가까이 있어 평야가 발달하지 못한 동해안에서 해안단구는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 된다.

실제로 구룡반도 동해안에는 구만리-대보리-강사리 해안을 따라 해발고도 10~35m 사이에 길이 약 5.5km, 폭 0.6km 규모의 평탄한 해안단구가 대규모로 발달해 있다.

구만리의 해안단구 최대 폭은 대략 1.3km에 이르며, 석병리-삼정리 지역의 해안단구도 길이 대략 2.2km, 최대폭은 900여 m를 자랑한다. 이처럼 구룡반도 동해안에 발달한 해안단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안단구로 평가된다.

아래 그림은 구룡반도 동쪽 해안의 대규모 해안단구 형성 과정을 도식화한 것이다. 강한 파랑의 침식으로 형성된 파식대는 지각의 융기로 해안단구가 된다. 이러한 침식과 융기가 오랜 시간 반복되면 해안가에 해발고도가 다른 계단 모양의 평탄한 해안단구가 형성된다.

또한 신생대 제4기의 기후 변화, 즉 빙하기와 간빙기의 반복도 해안단구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후빙하기에는 해수면이 현재보다 125m나 낮았다. 이 시기엔 파랑의 침식으로 형성된 파식대가 해수면 하강으로 인해 육지가 드러나면서 해안단구가 됐다.

이후 간빙기가 오기까지 수만 년의 시간 동안 지각이 융기한다. 수만 년의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도래하며 해수면이 다시 상승했지만, 빙기 동안 융기한 파식대는 여전히 해수면보다 높은 위치에 남게 됐다(그림3).

호미곶 해안단구는 포항 동해안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지각의 융기와 제4기 기후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거 지형이다. 이런 지형·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북 동해안 세계지질공원의 지오사이트로 지정됐다(그림3).

기존 연구에 따르면, 구룡반도 동쪽 해안의 해안단구는 총 4단의 해안단구가 발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독수리 바위 안내판에는 해안단구를 바다 계단이라는 순우리말로만 표현해 놓았을 뿐, 구체적인 규모나 형성 과정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 안내 문구만 보고, 구룡반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해안단구를 단순히 작은 계단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해안단구의 과학적 배경과 지형적 의미를 제대로 담은 안내판이 새로 설치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그림4 구만리의 해안단구 퇴적층.
▲ 그림4 구만리의 해안단구 퇴적층.

◇융기의 증거 해안단구 퇴적층
구룡반도가 자리한 한반도 동해안은 현재도 융기하고 있는 해안이다. 해수면에서 파랑의 침식으로 형성된 파식대가 수십 미터 높은 곳에 자리한 해안단구가 됐다는 사실은 구룡반도 해안이 융기해안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특히 해안단구가 4단으로 발달해 있다는 점은, 구룡반도 해안이 지속적으로 융기해 왔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융기의 흔적은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해안단구 퇴적층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

기반암인 장기층군의 암석은 파랑의 침식으로 평탄해졌으며, 그 위에는 파랑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둥근 자갈이 퇴적됐다. 이후 융기 과정에서 해안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와 해안단구 역층 위에 쌓여 사구를 형성했다.

이는 현재 해안에서 형성되고 있는 사구가 아닌, 과거 이곳이 해수면 높이에 있던 시대에 형성된 사구 모래층으로, 고(古) 사구 층이라 불린다.

◇시대에 따라 변해온 해안단구의 토지 이용
구룡반도 동쪽 해안에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구룡포와 대보항이 자리하고, 해맞이 광장 같은 대규모 관광시설이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넓은 해안단구가 해안 가까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 넓은 해안단구는 풍부한 농산물 생산뿐만 아니라 주거 공간으로도 활용돼 비교적 많은 인구를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드론으로 강사리에서 구만리 방향으로 촬영한 해안단구 전경이다. 현재 모습을 보고는 믿기 어렵지만, 사진 오른쪽의 산지와 농경지 사이의 급사면은 과거 파랑의 침식을 받았던 해안절벽(해식애)이다.

당시 해안선은 융기해 현재 해발고도 50m에 이르렀다. 구룡포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 왼편, 해안 가까이에 조성된 소나무 숲 부근은 가장 최근에 형성된 해안단구로, 고도는 약 10m다. 해안가에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지점까지는 파랑의 침식으로 형성된 파식대가 자리해 있으며, 그 위에는 유명한 상생의 손이 세워져 있다(그림5).

▲ 그림5 대보리-구만리 일대의 해안단구.
▲ 그림5 대보리-구만리 일대의 해안단구.

이 지역은 4단의 해안단구 면으로 구성돼 있지만, 경지 정리로 인해 각 단구 면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산에서 바다 방향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를 통해 고도가 다른 단구 면이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지역은 지리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해안단구의 토지 이용’을 실제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60년대 지도에 따르면, 구만리에서 석병리에 이르는 해안단구는 대부분 밭농사로 이용됐다. 우리나라 연평균강수량보다 비가 적고, 큰 하천도 없는 경북 동해안의 특성상 해안단구에선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보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는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보와 구만리 해안단구는 대표적인 밭농사 지역이었다(그림6).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보리, 강사리, 삼정리처럼 작은 하천이 흐르는 지역에만 논이 분포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림6 시대에 따른 해안단구의 토지 이용 변화. (왼)1960년대, (오)1970년대.
▲ 그림6 시대에 따른 해안단구의 토지 이용 변화. (왼)1960년대, (오)1970년대.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과 농경지 확장정책에 힘입어 대보저수지, 강사저수지, 삼정저수지가 축조되고, 경지 정리가 진행되면서 해안단구의 토지는 대부분 논으로 전환됐다(그림7).

이는 사회, 경제적 여건의 변화가 토지 이용 패턴을 바꾸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식량 자급이 국가의 중요 정책이었던 시절,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 재배와 혼분식이 적극 장려됐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도시락을 검사해 쌀밥을 가져오면 꾸중을 하기도 했다.

밭농사보다 인구부양력이 큰 논농사의 확대를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논을 밭으로 전환하던 이 시기에 호미곶 해안단구도 같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에도 유채꽃과 메밀꽃을 심은 밭둑 옆에 저수지의 물을 논으로 흘려보냈던 시멘트 수로가 남아있어, 이곳이 논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그림7 강사리 저수지.
▲ 그림7 강사리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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