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시조 5세손 손소, 삼남지방 4대 명당으로 꼽히는 '양동마을'에 입향…현재까지 명문가 전통 이어와

▲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손소의 차남이자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손중돈의 옛집. ⓒ국가유산청
▲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손소의 차남이자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손중돈의 옛집. ⓒ국가유산청

한반도 최초 통일 국가를 세운 신라의 천년 도읍인 경주는 신라 왕들로부터 유래된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 된 6촌의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까지 많은 성씨의 득성조가 있어 우리나라 씨족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본지는 연속 기획으로 경주에서 유래한 성씨, 특히 6촌 촌장들로부터 유래한 성씨들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역사를 조명하고, 그 후손과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국효(國孝)를 시조로 두고 조선 대표 양반으로 득세하다.

신라를 초대 왕인 박혁거세를 옹립한 육촌 촌장 중 하나였던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 구례마(俱禮馬)로부터 시작된 경주 손씨는 신라 42대 흥덕왕 때 국가 최고의 효자를 뜻하는 ‘국효(國孝)’로 추앙받은 손순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고려 후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손경원(孫敬源)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 아들 손현검(孫玄儉)은 검교중추원부사를 지냈고, 조선시대로 들어서며 3세손 손등(孫登)이 조선왕조에서 사헌부 감찰이라는 요직을 지냈고, 증손 손사성(孫士晟)이 문과에 합격하여 이조참판을 지냄으로써 문신가문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서게 되었다.

손사성은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손욱(孫旭)과 손소(孫昭)의 형제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특히 손소는 경주 양동마을에 입향한 인물로, 양동마을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주 손씨의 대표 집성촌으로 꼽히고 있다.

▲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에서 고유제를 봉행하고 있는 경주 손씨 후손들. ⓒ경주시청
▲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에서 고유제를 봉행하고 있는 경주 손씨 후손들. ⓒ경주시청

□경주 손씨, 천하 명당 ‘양동마을’에 터 잡다.
경주 손씨의 득세를 얘기하자면 ‘양동마을’이 빠질 수 없다.

양동마을은 여주 이씨와 경주 손씨가 세거한 곳으로, 경주 손씨 중시조 5세손인 손소(孫昭, 1433~1484)가 처음으로 입향했다.

경주 손씨가 양동마을에 입향하게 된 배경은 조선전기 혼인 문화에 기인한다.

조선시대 중후기 이래 유교적 종법 질서가 자리잡은 후에는 양반사회에서 혼인 후 여자가 남자 집에서 사는 ‘시집간다’라는 형태가 자리잡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그 전인 조선 전기까지는 혼인 후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사는 ‘장가간다’가 일반적인 형태였다.

양동마을 역시 남자가 장가들어 사는 ‘처가입향’의 대표적인 사례로, 풍덕 류씨 남자가 여주 이씨 처가에 장가들고, 시간이 지나 경주 손씨 남자가 풍덕 류씨 처가에 장가들고, 뒤이어 또 다른 여주 이씨 남자가 경주 손씨 처가에 장가들면서 정착해 간 사례다.

즉, 조선 세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손사성의 차남 손소가 양동마을의 풍덕 류씨 류복하에게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에 사위로서 이사왔다.

류복하는 외동딸의 사위인 손소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고, 손소는 처가의 상속자로서 양동마을에 들어와 이후의 세계를 계속 이어갔다.

손소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손소의 고명딸과 여주 이씨의 이번이 혼인하며 여주 이씨가 양동마을에 재입향하게 됐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이자 퇴계 이황의 스승으로 영남 학파의 근간으로 불리는 이언적이다.

때문에 이언덕의 후손은 물론이고 양동마을 출신 양반들은 대대로 명문대가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됐고, 당연하게도 양동마을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됐다.

특히 갑술환국 이후 노론에 의해 중앙 정계에서 영남 남인이 거의 배제되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양동마을은 문과 급제자 29명 등 총 116명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고, 이외에도 수많은 학자들과 선비들이 탄생했다.

경주 손씨가 배출한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총 21명으로, 그 중 손소 이후 문과에 급제한 인물만 해도 손소의 차남 손중돈을 포함해 18명에 이른다.

▲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 사랑채. 서백당은 경주 손씨의 종택을 부르는 이름으로, 양동마을에 입향한 손소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 사랑채. 서백당은 경주 손씨의 종택을 부르는 이름으로, 양동마을에 입향한 손소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주 손씨의 양동마을,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는 1972년에 선포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이 2012년에 40주년을 맞아 세계 160여 나라에 산재한 981점의 세계유산 전체를 대상으로 심사했다.

이듬해인 2013년, 세계유산의 핵심 정신인 ‘지속 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를 선정했고, 양동마을이 그 가운데 하나로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양동마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양반 집성촌으로, 처가입향 문화에 따라 양동마을을 거쳐 간 성씨는 여럿 있었지만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년 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조선 씨족마을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사례다. 또한 이러한 씨족마을 공간을 기능적으로나 경관적으로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 유산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양동마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학인 풍수지리에 입각한 구성을 보여주며 자연과 인공건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풍수상 길지(吉地)에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산기슭 입지의 대표적 사례인 물(勿)자 형을 이루면서 삼남지방(경상,전라,충청) 4대 명당으로 손꼽힌다.

이 곳에 지은 건축물 역시 지형의 경사에 기대어 집의 자리를 잡고, 집에서 바라보이는 조망점을 풍수의 원칙에 따라 조정해 세워졌다.

▲ 손소 초상. ⓒ한국학중앙연구원
▲ 손소 초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전통으로 인해 양동마을의 양반이 남긴 건축유산은 물론이고 고문헌과 예술작품을 잘 보관해왔으며,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무형의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잘 유지해오고 있다.

특히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기와집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해 국보 1점, 보물 5점, 국가민속문화유산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유산 8점 등 도합 26점의 지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전체가 또 하나의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양동마을의 가장 큰 가치는 정주형 문화유산이라는 점에 있다. 대부분의 사적지가 사람이 떠나고 마을과 건축물만 남은 반면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의 후손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에서도 이러한 정주형 문화유산은 극히 드물고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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