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손씨 중시조 손순(孫順), 신라의 ‘국효(國孝)’로 추앙받아 현세에도 이어져

▲ 삼국유사 5권(56~60) 손순매아 설화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 삼국유사 5권(56~60) 손순매아 설화 부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반도 최초 통일 국가를 세운 신라의 천년 도읍인 경주는 신라 왕들로부터 유래된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 된 6촌의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까지 많은 성씨의 득성조가 있어 우리나라 씨족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본지는 연속 기획으로 경주에서 유래한 성씨, 특히 6촌 촌장들로부터 유래한 성씨들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역사를 조명하고, 그 후손과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 박혁거세 옹립한 촌장 구례마로 시작된 ‘손씨’
우리나라 손씨의 유래는 신라의 첫 번째 왕인 박혁거세를 옹립했던 육촌 촌장 중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 구례마(俱禮馬)가 그 시작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동국사략(東國史略)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육부(六部)가 알천(閼川)에 모여 상의해 박혁거세를 옹립해 임금으로 모시고 서라벌에 도읍을 정했다.

그 후 서기 32년 신라 유리 이사금이 육촌을 육부로 승격하고 무산대수촌은 모량부(牟梁部)가 됐고, 강직하고 후덕한 인물로 회자되던 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를 사성한 것이 경주 손씨의 시작이다.

신라 42대 흥덕왕 때 신라 최고의 효자이자 ‘국효’로 추앙받는 손순(遜順)을 중시조로 삼고 있는데, 손순은 구례마와 손직의 후손이다.

중시조 손순으로부터 손씨는 경주(慶州), 밀양(密陽), 평해(平海) 세 파로 갈렸는데, 손순의 손자 손익원(孫翼洹)이 월성군에 봉군되며 후손들이 본관을 경주로 하게 됨으로써 경주 손씨는 우리나라 손씨의 ‘큰집’이 됐다.

▲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대문채 송첨종택은 현재 경주 손씨 종 택으로 양동마을에 서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지역N문화포털

□부모를 위해 자식을 버리려 했던 ‘국효’ 손순
손씨 가문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이 바로 중시조 손순이다.

신라 흥덕왕 때 인물인 손순은 신라 최고의 효자로 추앙받으며 ‘국효’로 불린 인물이다.

손순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손순매아(孫順埋兒 : 손순이 아이를 묻다) 설화로 전해진다.

모량리 사람 손순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고용돼 일을 하며 쌀을 받아 늙은 어머지를 봉양했는데, 가난한 형편에서도 어머니 모시기를 지극정성으로 했다.

▲ 경주손순유허 비각. ⓒ국가유산청

그러던 중 굶주림이 극에 달한 상황까지 겪던 차에 어린 자식이 매번 어머니의 밥을 빼앗아 먹는 일이 벌어졌다.

손순은 이를 곤란하게 여겨 그의 아내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는데, 그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하겠소? 우선 이 아이를 묻어 버리고 어머니의 배를 채워 드립시다”라고 했다.

아내는 손순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아이를 업고 모량리 서북쪽의 취산 북쪽 들판으로 가서 묻기로 했다.

손순이 들판으로 가 아이를 데리고 가 묻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그 땅에서 돌연 석종(石鐘)이 솟아나왔다.

▲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안채 송첨종택은 현재 경주 손씨 종택 으로 양동마을에 서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지역N문화포털

부부가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시험 삼아 그 종을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 삼아 쳐보니 그 소리가 은은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내가 “이 기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하늘이 아이에게 준 복이니 아이를 묻지 맙시다”라고 하자 손순 역시 그리 여겨 아이와 종을 함께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달고 치니 그 소리가 아름다운데다 멀리 퍼져 대궐에까지 들렸다.

사람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겼고, 궁궐에 있던 흥덕왕 역시 종소리를 듣게 됐다.

흥덕왕은 신하들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들리는데, 맑으면서 멀리 들리니 비할 데가 없다”며, 이 아름다운 종소리의 근원을 알아오라고 신하들에게 지시했다.

왕의 명을 받은 사자가 손순의 집에 와서 살펴보며 석종의 유래와 아이를 묻으려 했던 궁핍한 사정과 효심을 듣게 됐고, 이 내용을 왕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왕이 그 사정을 듣고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묻으니 하늘이 금솥을 내렸고,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고 하니 땅에서 돌종이 솟구쳤다.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는 천지에 같은 귀감이다”라며 감탄했다.

▲ 경주 손씨 중앙종친회 종친회 기 손순 설화에 나오는 석종이 그려져있다. ⓒ경주 손씨 중앙종친회

이후 왕은 부부에게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섬을 내려 지극한 효를 숭상하게 했다.

손순은 왕이 하사한 새 집으로 옮긴 뒤, 자신이 묵던 엣 집을 절을 짓는 데에 기부해 홍효사(弘孝寺)라 불렀고, 석종을 그 절에 안치했다.

안타깝게도 이 석종은 훗날 진성왕 대에 백제의 도적떼가 그 마을에 들어가서 사라졌고, 절만 남게 됐다.

석종이 발견된 들판을 완호평(完乎坪)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됐고, 효의 상징적인 설화로 오래도록 회자되고 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경주 손씨의 효심
경주 손씨의 중시조인 손순의 일화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주 현곡면 소현리 마을 입구 손순의 옛집터로 알려진 곳에 유허지가 조성돼있으며, 문효사(文孝祠)가 있어 그의 효행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 경주 손순 문효사와 홍효문.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효사는 손순과 그의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문효사 정문 홍효문인데, 은 손순의 옛집 터에 세웠던 홍효사를 전승했다.

문효사가 있는 소현 마을 역시 옛 이름이 손순을 기리며 ‘순우정(順友亭)’으로 불렸다. 마을에 손순의 이름을 딴 정자가 있었는데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손순의 후손들이 선조의 이름자를 마을 이름에 붙이는 것을 싫어해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지금의 ‘소현(小見)’으로 고쳤다고 한다.

손순유허비에는 ‘신라효자문효공손순유허비(新羅孝子文孝公孫順遺墟碑)’라고 새긴 비가 있는데, 조선 말기 학자 허전(許傳)이 쓴 유허비가 1970년 즈음에 파괴돼 이후 지금의 비를 새로 만들었다.

손순유허지는 1996년 시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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