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 통일 국가를 세운 신라의 천년 도읍인 경주는 신라 왕들로부터 유래된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 된 6촌의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까지 많은 성씨의 득성조가 있어 우리나라 씨족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본지는 연속 기획으로 경주에서 유래한 성씨, 특히 6촌 촌장들로부터 유래한 성씨들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역사를 조명하고, 그 후손과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 (아랫줄 왼쪽부터)우당 6형제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윗줄 왼쪽부터)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이호영(李護榮, 1885~1931)
▲ (아랫줄 왼쪽부터)우당 6형제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윗줄 왼쪽부터)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이호영(李護榮, 1885~1931)

알천양산촌의 알평으로부터 시작된 경주 이씨는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질 만큼 대한민국의 대표 씨족으로 성장해왔다.

한국의 대표 성씨 중 하나인 만큼 경주 이씨 후손들은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해방과 전쟁 이후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조선의 해방과 국가 재건의 중심에 섰던 ‘우당 6형제’

그 중 이회영과 이시영을 포함한 ‘우당 6형제’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결단과 희생은 현재까지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헌신적이었던 일가로 평가되고 있다.

경주이씨 중시조 상서공파-백사공파 35세인 우당 6형제는 조선 후기 명문가 출신으로, 서울 명동 일대의 땅을 소유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우당 6형제는 당시 돈으로 40만원(현재 가치로 약 2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비밀리에 처분한 후, 가족 6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 돈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후 10년간 약 3500명의 독립군 장교와 병사를 양성하는 데 기여했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후 극심한 가난에 직면했으나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는데, 조선의 10대 갑부 중 하나였던 둘째 이석영은 중국 상하이의 빈민가에서 국수와 비지로 연명하다가 영양실조로 사망하기도 했다.

넷째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가다가 중국 다롄(大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순국했다.

여섯째 이호영 역시 만주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며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벌여오다 일본군의 습격에 의해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해방을 맞이한 이시영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명동의 생가 터와 재산을 환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이시영은 “한번 민족에 바친 것이니 되받을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 이병철, 세계 일류 기업으로 펼친 ‘사업보국(事業報國)’ 철학

경주 이씨 중시조 39세(판전공파) 이병철 회장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꼽히는 삼성그룹의 창업주로, 기업을 통해 국가 경제발전을 이끌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과 ‘인재재일(人才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의 철학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는데, 이는 다섯 살 때부터 조부인 이홍석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계승한 경주 이씨 가문의 학문적 전통과 연결된다.

그의 업적은 단순한 기업 경영을 넘어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병철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립해 중국과 만주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개화기의 혼돈과 일제치하의 태평양전쟁, 한국동란 등 민족의 대수난을 겪으면서 사업보국의 염원을 한결같이 지켜왔는데, 전란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땅에 빈손으로 피난해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대구에서 제일모직을 세워 그 시대에 이미 수입대체산업의 효시를 이뤘다.

또 농업의 자급자족을 통한 민생안정의 방안을 구상했던 이병철은 1967년 당시 시계 최대의 단일비료생산시설인 한국비료공장을 세워 5천년 민족사의 숙원인 빈곤추방의 계기를 만들었다.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설립해 대한민국을 지금의 세계적인 전자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1983년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며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반도체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병철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해 교육과 예술 발전을 지원하며 대한민국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또 1982년에는 동양 최대의 사립미술관이었던 호암미술관을 세워 후세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긍지를 심어줬다.

이병철로 시작된 삼성그룹은 ‘범삼성가’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현 시점 대한민국 경제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이병철의 자녀들이 세우고 이끌었던 기업들만 나열해도 한솔그룹, CJ그룹, 새한그룹, 신세계그룹 등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 6형제 서간도 망명논의 상상화. ⓒ서울역사박물관
▲ 6형제 서간도 망명논의 상상화. ⓒ서울역사박물관

◇ 한국의 문화를 빛낸 경주 이씨들

경주 이씨 후손들의 업적은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도 대한민국 역사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다.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은 중시조 39세(금남공파)로,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3년 시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며 당시 문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시는 개인의 자유와 저항정신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상화 시인은 이 시를 발표한 해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귀국 후 1926년 잡지 ‘개벽’에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며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담은 작품으로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상화는 교육계에 몸담으며 민족의식의 전승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는데, 1933년 대구 교남학교(현재 대륜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조선어와 영어, 작문 과목을 담당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 학교 교가를 작사하기도 했으며, 또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해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이 학교 권투부 출신들이 훗날 대구 권투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최근 영화 ‘승부’로 재조명되고 있는 프로바둑 기사 이창호 9단 역시 경주 이씨의 후손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둑 기사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로, ‘바둑의 신’으로 불리운다.

고작 13세의 나이에 최다연승(41연승),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1994년, 제18기 기왕전 우승), 최다관왕 기록(13관왕). 연간 최고승률 기록 88.24%(75승 10패, 1988년)의 업적을 이뤄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바둑 기사였던 조훈현의 내제자로서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은 일화는 최근 영화로 제작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AI를 이긴 처음이자 마지막 인류로 일컫는 이세돌 9단마저도 이창호 9단에 대해서는 “이창호 기사님을 이기는 게 사실상 목표였고, 사실 끝까지 넘지는 못했던 거 같아요”라며, “바둑의 신이었어요. 사실상”이라 말한 바 있다.

저작권자 © 영남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