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중 최고(最古)의 성씨…2천년 역사 이어오며 번창해…이제현 묘지명 통해 1천년 간 실전된 세계 확인돼
한반도 최초 통일 국가를 세운 신라의 천년 도읍인 경주는 신라 왕들로부터 유래된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 된 6촌의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까지 많은 성씨의 득성조가 있어 우리나라 씨족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본지는 연속 기획으로 경주에서 유래한 성씨, 특히 6촌 촌장들로부터 유래한 성씨들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역사를 조명하고, 그 후손과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 이씨 중 최고(最古)의 성씨, “경주 이씨”
이(李)씨는 우리나라에서 김(金)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성씨다.
그 중 경주 이씨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성씨로, 오늘날 74세까지 약 2천여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경주 이씨의 시조 이알평에 연원을 두고 있는 분관 또한 상당히 많다.
이 중 그 계통과 세대가 확인된 분관은 총 8본으로, 시조 후손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 ‧ 차성 이씨 ‧ 우계 이씨와, 중시조 이거명의 후손 계대에서 분적한 원주 이씨 ‧ 아산 이씨 ‧ 재령 이씨 ‧ 진주 이씨 ‧ 장수 이씨가 이에 속한다.
그 외 많은 성씨가 경주 이씨 시조의 후손이라고 칭하고 있으나 분적조를 확인할 수 없어 확실치 않다.
경주 이씨에서의 분관이 확실치 않은 성씨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선 왕조의 성씨인 ‘전주 이씨’인데, 전주 이씨의 기원에는 중국 기원설과 함께 경주 이씨 분적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삼가 선원(璿源 : 임금의 집안)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디 나온 곳은 바로 경주 이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전주 이씨의 뿌리를 경주 이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경주 이씨에서 분관한 합천 이씨 족보에서 실전된 이알평에서 이거명까지의 36대 명단을 찾아냈는데, 그 중 24세 이두희의 동생 이진두의 손자가 전주 이씨의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이라는 설이 있다.
□ ‘화백회의’의 수장 알평, 이(李)씨의 시조가 되다.
경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6부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인 표암공(瓢巖公) 알평(李謁平)이다.
경주 이씨 족보에 의하면 알평은 기원전 117년에 하늘에서 진한(辰韓) 땅의 표암봉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성(姓)은 이(李)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좌명대신(佐命大臣)으로, 200세 가까이 향수(享壽)했다고 한다.
알평은 양산촌의 촌장이면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주적 의결제도로 평가받는 ‘화백회의’를 주재하는 수장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 3월 1일 6촌의 촌장들이 가의 자제들을 이끌고 알평이 다스리는 알천 기슭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했다고 하는데, 이때의 회의를 주재한 이가 알평이다.
이 날의 결정 이후 양산 밑 나정 옆에서 발견한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키워 13세가 되던해에 신라의 초대 왕으로 추대했다.
이 모든 결정은 알평이 주재한 화백회의를 통해 결정됐다.
회백은 신라 후대에 전통화된 관례인데, 중국의 사서에도 간략한 기록이 보인다.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에는 “공공의 큰 일에는 많은 관리들을 모아놓고 자상하게 의논해 완결짓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일은 반드시 많은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데 ‘화백’이라고 부른다. (논의하다가도) 한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만둔다”고 했다.
후대에는 이 화백제도를 민주주의의 발상이자 만장일치로 의결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도 평가하고 있다.
또 유래를 기원전 69년 알천에서 알평이 주재했던 6촌 회의에 두고 있으니 알평은 우리민족 최초의 민주적 회의체의 수장이었던 셈이다.
이에 더해 위서 논란이 있지만, 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는 신라좌명공신육부대인기(新羅佐命功臣六部大人記)에서 이알평에 대해 “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40년간 섭정(攝政)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평이 6촌의 부족사회를 이끄는 수장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기에는 모자람이 없겠다.
알평의 이씨 성은 유리왕 9년(서기 32년) 알천양산촌이 급량부(及梁部)로 개칭되면서 함께 사성받았다.
사후에는 법흥왕 23년(서기 535년) 시호를 충헌공(忠憲公)이라 하였고, 태종 무열왕 3년(서기 656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
□ 천년을 건너 이어진 후계, 중시조 이거명(李居明)
경주 이씨의 족보는 시조 이알평 이후 약 천년 동안의 후계가 실전됐다.
실전된 후계가 이어지게 된 것은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목은(牧隱) 이색이 지은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 덕분이다. 이색은 이제현의 문하생이었다.
이제현의 묘지명은 이알평을 신라 시조인 혁거세의 좌명공신으로 소개하며, 그 후손으로 소판(蘇判 : 신라 17관등 중 제3관등) 거명(居明)을 밝히고 있다. 또 신라 관제에서 소판은 오직 진골이라야 얻을 수 있다고도 적었다.
그동안 이제현 묘지명은 문헌으로만 전해졌으나, 지난 2007년에 황해북도 개성시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길이 1.68m, 너비 63.2㎝, 두께 20.5㎝, 무게 600㎏에 달하는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됐다.
묘지명은 모두 34줄에 2745자로,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묘지석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고 내용도 풍부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묘지명을 통해 이제현의 조상이 신라 말 진골 출신으로 소판 벼설을 지낸 이거명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됐고, 시조 알평 이후 기록으로 전해지는 최초의 선조가 됐기에 현재 경주 이씨 후손들은 이거명을 중시조로 받들고 1세로 하여 아랫대 후손을 헤아리고 있다.
이후 경주 이씨는 고려 말 중시조의 15~21세에서 총 14개 대종파(大宗派)로 분파됐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소 70여개 파로 분파됐다.
대종파 분파는 대체로 이거명으로부터 분파를 하기 시작하는데, 16세 이인정을 파조(派祖)로 하는 평리성암공파(評理誠菴公派), 17세 이관을 파조로 하는 이암공파(怡菴公派), 그 아우 이제현을 파조로 하는 익재공파(益齋公派), 그 아우 이지정을 파조로 하는 호군공파(護軍公派),역시 17세 이천을 파조로 하는 국당공파(菊堂公派), 그 아우 이매를 파조로 하는 부정공파(副正公派), 그 아우 이과를 파조로 하는 상서공파(尙書公派), 그 아우 이조를 파조로 하는 사인공파(舍人公派), 15세 이강을 파조로 하는 판전공파(判典公派), 21세 이지수를 파조로 하는 월성군파(月城君派), 19세 이양오를 파조로 하는 직장공파(直長公派), 그 아우 이존오를 파조로 하는 석탄공파(石灘公派), 그 아우 이존중을 파조로 하는 진사공파(進士公派), 그 아우 이존사를 파조로 하는 교감공파(校勘公派) 총 14개 대종파로 나뉘었다.
이 중 백사 이항복의 상서공파, ‘이완 대장’의 국당공파, 이제현의 익재공파 3파가 특히나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며 가장 번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