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흐름에 따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재해석된다.
최근 서구 열강들이 발전된 항해술을 바탕으로 전세계를 식민지화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과거 역사는 세계를 지배했던 서구 열강 중심의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봤지만 최근에는 삶의 터전을 빼앗긴 식민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역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동학농민란으로 기록됐고 시대가 흘러 동학농민운동으로 불렸다.
이윽고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한 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동학혁명의 근간이자 발현지가 포항이었다는 것을 아는 시민들은 얼마나 될까?
필자는 동학의 시작이 포항이며 그 중심에 포항사람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있었음을 알리고 포항이 국가산업을 주도했던 철강 도시에 앞서 문화와 혁명의 도시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해월 선생을 재조명해 보고자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해월 선생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동학(東學)은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사람이 곧 하늘(한울님)이다’라고 주창한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신분이나 성별 등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진정한 평등과 동등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조선시대는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상이었기에 기득권 세력에 의해 탄압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해월 선생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하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니라”라는 표현은 삼경사상(三敬思想)이 잘 담겨있다.
해월 선생은 동학의 2대 교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접주제(接主制)를 바탕으로 동학 교단을 전국적인 조직으로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해월 선생의 제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은 봉건사회와 외세에 항거한 동학농민혁명을 지도했고 제자이자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에 자금과 인력을 지원 등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해월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사상을 이어온 제자들은 모두 각자 위치에서 보국운동을 해왔다.
이 정도의 지식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과 해월 선생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좀 더 해월 선생과 동학에 대해 심도있게 들어가보자.
동학사상이 세상에 나오던 시대는 흥선대원군의 세도 정치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틈타 서양 종교인 천주교가 점차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은 외세의 침략 위협과 천주교의 확산에 대응해 우리 것을 지키고 외세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동학은 반봉건적이며 반외세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사상의 핵심은 인내천 사상으로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정면으로 대치했다.
이런 동학을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동학사상을 제자들에게 교리해 나라를 빼앗긴 슬픔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자 하던 독립운동가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해월 최시형’ 선생이다.
해월 선생의 사상과 생애을 연구해온 윤석산 시인은 “해월 선생은 힘든 삶을 산 사람이지만 끝없이 새로운 삶을 추구했고 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자 노력함으로써 인류의 커다란 스승으로 우뚝한 삶을 산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윤 시인은 해월 선생의 생애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 말한다.
첫째, 포항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다.
1827년 3월 21일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태어났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이와 함께 친척집과 머슴살이, 심부름꾼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
가정을 꾸리긴 했지만 동학에 입도하기 전까지 가진 땅과 재산 없이 깊은 산간 마을 생활에서 생활하며 가난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고난의 삶을 살았다.
둘째, 동학에 입도해 2대 교주가 되다.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을 만나 ‘봉건적 인간에의 이념’에서 벗어나 성현(聖賢)은 성현의 자질을 우부(愚夫)는 우부의 자질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체득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신념을 새롭게하고 실천함으로써 마침내 한국 근대사 속 우뚝한 민중 지도자이자 위대한 사상가가 된 것이다.
윤 시인은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을 만난 것은 그의 삶이 대전환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해월 선생은 수련을 통해 천어(天語)를 듣게되고 수운 선생이 포덕(布德)의 권한을 부여한다.
이 시기에 동학은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접주제(接主制)를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영향권을 넓혀가고 있었다.
접주제는 각 지역별로 접이라는 조직을 두고 접의 책임자를 접주로 임명하고 기밀을 유지하고 정보를 교환했다.
동학 분포의 중심지인 흥해에서 각 지역의 접주를 임명하는 접주제를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날 흥해읍 매산리 당수나무에 ‘최초 동학 조직 안내 표지판’이 설치해 접주제의 시작이 흥해였음을 알리고 있다.
수운 선생은 가장 신뢰했던 해월 선생을 모든 접을 관장하는 도통(道統)을 전수했고 결국 해월 선생은 동학 2대 교주가 된다.
셋째, 종교적인 체계를 확립하다.
수운 선생이 대구에서 순도하자 해월 선생은 1898년 순도할 때까지 피신의 시기를 맞이한다.
사방으로 흩어져 숨어살던 동학 교도들은 해월 선생이 살고 있던 영양 일월산의 작은 마을 용화동에 모여들었고 용화동은 비밀 포교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는데 이필제(李弼濟)가 주도한 영해민란에 연루돼 용화동은 풍비박산이 나게됐다.
또다시 쫓기는 몸이 돼 숨어살면서 49일간의 특별수련과 동학교단을 수습하는데 집중했다.
교단 형성을 위해 수운 선생의 문집을 경전(經典)으로 바꾸고 수행, 의례 등을 구축하고 간행해 종교적인 면모와 체계를 공고히 했다.
수운 선생의 가르침이 경전으로서 자리매김했고 이는 동학이 종교로서 분명한 독자성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넷째, 대사회적 활동 시기에 접어들다.
동학의 대사회적 활동은 수운 선생의 억울함을 풀고 탄압을 중지해달라는 ‘교조신원운동’부터 시작됐다.
1892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해월 선생의 지도하에 네 차례에 걸쳐 전개됐다.
동학의 반외세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교조신원운동은 척양척왜로 전이됐고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
동학혁명이 제자 전봉준 중심으로 일어났고 녹두장군 전봉준이 기병에 대해 해월 선생과 상의했는지 여부에 대해 오늘날까지 갑론을박이 있지만 선생은 기병 자체를 반대했다기 보단 아직 무력을 행사하며 기병을 시기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윤 시인은 “해월 선생은 급진적 성향을 지닌 중간지도자와 달리 시기(時期)에 대해 신중함의 태도를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 선생과 전봉준의 기병에 대해 ‘안으로는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덕을 내면화시켜 내적역량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공론을 형성해 혁명적 주체의 역량을 강화시킨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근 해월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는 단체와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포항사람 해월 최시형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고 널리 알리고 있는 ‘동대해문화연구소’의 이석태 이사장은 “포항은 대한민국 현대산업화를 이끈 명실상부한 제1의 철강도시이자 산업도시임은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포항이 산업도시를 말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됐던 동학사상의 발현지임을 명심하고 계승·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동학사상을 계승발전하기 위한 지자체들의 노력이 일고 있다.
경주시는 해월 선생의 스승이자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생가를 복원하고 관리하고 있다.
제자이자 3대 교주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건국공로훈장 중장 수훈했고 청주시는 의암 선생 유허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물로 지정하는 등 민족정신을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동학의 발현지이자 동학 조직을 성장과 활성화를 이룬 포항은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움직이 없는 것이 필자는 안타깝고 아쉽기만 하다.
지금부터라도 포항시민들과 포항시가 시대를 앞서간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과 정신에 보답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을 제안해 본다.
한편 동대해문화연구소는 올해부터 포항 전지역을 돌며 ‘포항사람 해월 최시형’라는 주제로 찾아가는 강연회를 연다고 밝혔다.
또 시민들과 해월 선생의 자취를 찾아가는 현장답사, 학술세미나 등도 열릴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