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역사박물관, 16일 조보 관련 학술세미나 개최...“1577년 발행 조선 첫 상업신문 조보, 선조가 강제 폐간”

▲ 조선시대 '조보' 경북 영천에 있는 사찰 용화사 주지 지봉 스님이 지난 17일 공개한 조선시대 조보(朝報). 조보는 조정 소식을 알리는 문서로 관보나 신문 역할을 했다. 일부 전문가는 용화사측이 공개한 조보가 진품이라면 세계최초 일간신문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연합
▲ 조선시대 '조보' 경북 영천에 있는 사찰 용화사 주지 지봉 스님이 지난 17일 공개한 조선시대 조보(朝報). 조보는 조정 소식을 알리는 문서로 관보나 신문 역할을 했다. 일부 전문가는 용화사측이 공개한 조보가 진품이라면 세계최초 일간신문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연합

경북 영천에 있는 사찰 용화사 주지 지봉 스님이 지난 17일 공개한 조선시대 조보(朝報). 조보는 조정 소식을 알리는 문서로 관보나 신문 역할을 했다.

일부 전문가는 용화사측이 공개한 조보가 진품이라면 세계최초 일간신문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조선시대 상업신문 역할을 한 조보(朝報)가 당시 국가권력(선조)에 의해 강제 폐간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

13일 영천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이 박물관이 소장한 조보는 1577년(선조 10년) 8월 민간업자들이 의정부와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처음으로 발행했다.

당시 왕실이나 중앙정부의 소식을 활자를 이용해 발행해 매일 신속하게 전달한 최초의 민간신문인 셈이다.

손으로 쓴 필사(筆寫) 신문이 읽기가 어려웠던 것에 비하면 제호(題號)가 조보인 이 인쇄조보는 해서체로 인쇄돼 글자만 알면 쉽게 읽을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내용도 다양해 첫 면에는 왕실과 인사이동 소식, 2면에는 당시 행정부였던 육조(六曹) 소식을 실었다.

현재 신문의 사회면에 해당하는 면에는 고급 수입마차 금지령이나 구제역에 따른 국가사업 지장 등과 관련한 소식도 실렸다.

그러나 이 조보는 첫 발행 석달만인 1577년 11월 “사사로이 역사를 만든다”는 이유로 선조에 의해 폐간됐다.

선조실록 등 기록에는 조보 발행 관련자 30명을 대역죄로 몰아 의금부에 가두고, 고문한 뒤 유배보냈다는 기록이 있다고 박물관 측은 전했다.

또 이 과정에서 양사(兩司·사간원과 사헌부) 관리들이 조보 관계자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인쇄조보가 중단된 뒤에는 일부에서 발행한 필사 형태의 조보가 명맥을 이어왔다.

육당 최남선은 ‘고사천자’(古事千字) 등 저술에서 “인쇄조보가 탄압으로 중단되지 않았다면 세계 최초 인쇄신문의 영예를 차지했을 것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西遊見聞)에도 조보가 유럽에서 인쇄한 신문보다 이른 시기 발행됐다는 설명이 나온다.

영천역사박물관은 조보와 관련한 세 번째 학술세미나를 오는 16일 박물관에서 연다.

세미나에서는 조보 발견자인 박물관장 지봉 스님이 ‘민간인쇄조보 제현상의 문제점’에 대해,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남권희 명예교수가 ‘민간인쇄조보 복원에 대한 고찰’에 대해 주제 발표를 한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 옥영정 연구원이 ‘1577년 민간인쇄조보와 16세기 서울의 상업출판’에 대해, 한국국학흥원 권오덕 연구원이 ‘민간인쇄조보에 사용된 활자와 조선전기 활자의 서체비교’에 대해 발표한다.

저작권자 © 영남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