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복의 무적구단 표지 ©영남경제

책 제목을 “‘무적구단(無赤求團)’으로 정한 건 나 자신이 평생 실천하고 애쓴 경제관 때문이다. 경제인으로서 언제나 ‘조직을 어떻게 끌어갈 것인가?’라는 대의를 품고 살아오다 보니 적자가 없었다.

적자란 반드시 금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먹거리까지 모색하고 개발에 조직을 구한다는 포괄적 개념을 포용하고 있다”며 “무적구단은 곧 무적구단의 실천적 덕목과 무관하지 않다” 손병복 인재육성아카데미 대표의 말이다.

손병복 대표는 프롤로그에서, 어린 시절에는 4대가 오순도순 도타운 정을 나누면서 살았다. 대가족의 울타리에서 우러나는 따뜻하고 좋은 기운이 습관의 천성에 스미고 영향을 미치기도 했던 것 같다.

증조부는 훈장이셨다. 마을 아이들의 글머리를 틔워주고, 식솔들에게는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일깨우셨다.

당시 코흘리개 때 1원짜리 지폐를 버렸다가 증조모로부터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증조모는 ‘살림이 거덜 나면 봄에 소를 팔게 된다’는 말씀으로 내게 일찌감치 경제관념이 스며들게 한 분이셨다.

장정 몇 사람이 덤벼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건장한 할아버지는 내게 칭찬으로 자존감을 높여주셨다. 손자들 가운데 나를 가장 귀여워하신 할아버지는 내 눈이 초롱초롱하며 호랑이 눈을 닮아 똑똑할거라고도 하셨다.

아버지는 증등학교 교사이셨다. 울진군이 벽지라 군내에서만 근무하신 아버지는 근무 점수가 높아 대구에서 여름방학 때 한 달간만 강습을 받으면 교감 승진이 될 수 있었지만, 우리 5남매와 숙부들의 뒷바라지로 그 강습을 미루시다가 승진 기회를 놓치기도 하셨다.

그 바람에 회갑이 가까워진 연세에 시험을 치러 교감으로 승진하셨다. 줄곧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신 아버지는 1991년 경상북도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해 한 표 차이로 아쉽게 낙선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선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셨다.

그때 나는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유권자인 경상북도의원들의 지인이나 가족들 가운데 삼성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찾아 도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교육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으며 곧은 행보를 하셔서 결국 그다음 선거에 출마해 경상북도 교육위원에 당선되셨다.

올곧고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별안간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화장실을 가신다면서 다른 방향으로 가시는 걸 보고 급히 대구의 병원으로 모셨다. 이마 양족의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수술한 후 기억력이 나빠 지셨다.

치매가 온 아버지는 건강 회복에 대한 의지가 약하셨고, 몇 년 후 겨울부터 집안에만 계시다가 이듬해 봄에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병상의 아버지를 보면서 문득 그 옛날 든든했던 등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던 밤, 아버지의 등에 업혀 바라본 세상은 고요하고 포근했다. 어둠 속에 총총 빛나는 별을 보면서 나도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아버지의 등과 맞닿은 가슴에 어렴풋하게나마 꿈을 새긴 것을 회상했다.

나는 무엇이든 꿈꾸고 도전하고 이루여 한다. 지금 나는 그때 아버지 연세를 훨씬 넘어섰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진로의 갈림길에 선 모든 대한민국 청년들을 위한 멘토가 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제법 깨우쳤다. 여섯 살 때 고모가 읽어주는 만화를 보고, 글을 배우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하루의 일과를 거의 학교와 도서관에서 보냈다.

삼국지는 몇 번 읽어도 재미있었다. 촉이 가난하니 특산물인 비단 수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제갈공명의 상소는 어릴 적부터 각인된 1원짜리 지폐의 소중함과 함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의미를 알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동했다. 높은 뜀틀도 훌쩍 뛰어 넘었으며, 누구보다도 모험심이 컸다. 모험심은 도전으로 이어졌다. 울진군 매화면 매화천의 높은 다리 위에서 모래밭 아래로 먼저 뛰어내리면서 형들과 친구들에게 용기를 부추기도 했다. 나의 ‘퍼스트 펭귄’과 같은 도전과 용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은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있다. 그 시기를 맞았을 때 중요성을 알지 못하면 그저 흔들리는 대로 살면서 때를 놓치게 된다. 나는 각자의 개성과 역할에 맞게 목표 달성에 집중해 때를 놓치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나는 장래 희망을 정해놓고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다. 공부보다는 이것저것 하다 보니 친구들 사이에 운동을 잘한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낼 수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줄곧 1,2등은 유지했다. 그 바탕은 복습과 예습이었다. 좋은 습관을 꾸준히 유지한다면 뜻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산의 진로를 깨우쳐주는 멘토는 꼭 필요하다. 늦게나마 내 위치를 아셨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나는 중앙대학교에 입학해 경제학을 공부했다.

꿈이었던 ‘삼성’에 합격해 1979년 2월, 신입사원 연수에 들어갔다. 삼성은 인재 확보를 위해 ROCT 장교로 군 복무를 해야 하는데도 입대하기 전에 채용하는 제도로 사원 관리를 했다. 연수를 마치고 대한민국 장교로 그해 3월 입대했다.

소대장이 어떻게 하든 한 소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소대원들이 소대장의 명을 거역한다면 모든 체계가 허물어진다. 나는 어깨에 단 녹색견장을 내려다볼 때가 더러 있었다.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소대원들이 그 명령을 잘 따르게 되는 것은 소대장이 부하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과 솔선수범이 선행돼야 한다는 걸 거듭 새기기도 했다.

특히 삼성에 입사한 후로는 원칙을 우선으로 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실천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병사들과 함께 풀려고 애쓰고 때로는 그들의 방패가 되기도 하면서 1981년 6월 30일 무더위가 막 시작될 무렵 군 복무를 마쳤다.

그 며칠 뒤인 7월 3일 삼성에 복직해 21기 1차로 4주간 연수를 마치고 삼성조선으로 배치됐다.

1981년 9월 30일, 긴 연애의 마침표를 찍고 평해 월송정 부근에 있는 월송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삼성에 입사해 희망에 벅찼던 때였다. 다음 기회에 긴 일정을 잡아 여행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고향 집 가까운 경주에서 1박2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삼성 재직 당시 아내는 임원 부인으로 특대우를 누리지 못했다. 그런 아내가 IMF 경제 위기 때 문구점을 꾸려 가정 살림에 보탬을 주었다. 아내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맏딸을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삼성전자에 입사해 미래를 향한 꿈을 키우고 있다. 둘째 딸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현대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아내의 내조 덕분에 한 지붕 아래 기업 임원과 사원들을 배출하게 된 셈이다.

삼성 사장이 꿈이었던 나는 거제의 삼성조선 현장 근무를 하던 중 서울 근무를 희망했다. 사업의 관건은 돈의 흐름을 아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금 업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일할 때에는 근본 원리를 반드시 확인하고 숙지했다. 하나하나 헤쳐나가다 보니 경영과 회계 측면에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고, 중장기 계획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게 됐다.

더구나 리더들의 장점을 배우려 노력하면서 마흔세 살 때 임원이 됐고, 임원으로 13년간의 재임 가운데 등기 임원 6년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세계 일등으로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장기 비전 설정과 목표 달성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실천하면서 조직을 목표 지향적으로 이끌어 가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2013년 가을 무렵, 삼성물산 출신이며 ROCT 선배인 김상항 사장과 운동을 하던 중이었다. “손 부사장,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의 본부장 공모가 있던데 알고 있는가?” 몇 군데 선망하는 곳에서 사장직 제의도 있어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상항 사장이 내게 한 물음이었다.

그때 나는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으로 퇴임한 뒤 그 회사의 자문역으로 일할 때였다. 생업에 쫓겨 밀쳐두었던 중앙대학교 MBA 과정을 밝으면서 면학 정진 중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부러울 게 없는 생활을 하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울진으로 갔다. 우리나라가 부자가 되려면 미래 산업으로는 원자력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화두가 됐다. 더구나 울진은 우리나라 최대의 원전 단지다.

2013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제18대 한울원자력본부장으로 취임했다.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2년의 임기를 마쳤다. 그런 노력과 지혜, 경험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됐다.

책 내용은 5부로 나누었다. 1부에서는 무적구단(無赤求團)의 심정으로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았다. 알기 쉽게 전하려고 애썼으나 원전 특성상 전문용어와 그림이 곁들여져 난해해 보일까 염려도 된다.

2부는 고향 울진에 터전을 둔 대가족 울타리에서 사랑의 담뿍 받고 자란 어린 시절 이야기이며, 3부는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흔들리며 보낸 고등학생 시절과 서울에서 청춘의 낭만을 즐기면서도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고심했던 대학생 시절 이야기이다.

4부는 ROTC 장교로 GOP에 근무하면서 부대원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리더의 기량을 키우는 이야기이다. 5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으며 뼈를 묻을 각오로 일하면서 역량을 펼쳤던 삼성에서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전, 삼성중공업 김정완 부회장의 발문에서, 일등 조선소를 만들기 프로젝트를 회사 차원에서 기획하고, 각 부문을 지원하면서 사장인 내가 제대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 프로젝트가 완성할 무렵인 2005년 1월, 손병복 상무는 삼성엔지니어링 경영지원실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중공업을 떠났다.

삼성엔지니어링에서 (故)이건희 회장의 경영 철학인 업의 개념에 맞게 경영하라는 참 뜻을 이해하고 이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손병복의 도전은 원자력발전소로 이어졌으며, 나는 이 책을 통해 새삼 손병복을 다시 보게 되기도 했다.

개인보다 조직 전체를 위한 마음과 경영자로서 부(富)를 만들어내는 안목이 생겨 있었다. 목표 달성을 위한 추진력과 소통력도 볼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태백산 금장산 왕등은 4대가 모여 살았던 인생의 고향이며, 35년을 함께한 삼성의 리더로 이끌어 준 청.장년 시절의 고향이다.

내가 신입사원의 최고 자질로 인성을 꼽는 삼성인이 된 연유를 거슬러 가보니 자연과 인문환경이 좋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인성이 좋다는 것을 알고 허투루 집을 구하지 않았던 증조부의 철학이 가슴 깊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어떤 일을 하든 좋은 인성이 기본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고, 기업과 사회생활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여러 힘든 일이 있을 텐데도 출판을 맡아 준 도서출판 시율 오시안 대표에게 감사드린다.

손병복 현 인재육성아카데미 대표는 1957년 울진 출생, 매화초, 평해중, 대구 계성고, 서울 중앙대학교 졸업, 육군 중위 전역(ROCT 17기), 삼성그룹 35년 근무(임원 13년 중, 등기임원 6년),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3년), 삼성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상무, 전무(10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6년), 삼성중공업(16년), 한국수력원자력 한울원자력본부장(2년)을 마치고 내년 지방선거에서 잘사는 울진발전을 위해 울진군수직에 도전하며 상생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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