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7호인 울진 불영사 불연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7호인 울진 불영사 불연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7호인 울진 불영사 불연(佛輦)이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천축산 불영사는 울진군 서면 하원리 120번지에 위치한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전통사찰이다.

이곳에는 응진전(보물 730호), 대웅보전(보물 1201호), 영산회상도(보물 1272호),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35호), 양성당부도(문화재자료 162호) 등 지정문화재만도 5건이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확한 소장 유물의 현황조차도 제대로 조사가 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곳에서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에 의해 새로운 불연 1채가 더 확인이 됐다.

불연은 절에서 시련의식(侍輦儀式)에 사용하는 불교 의식구로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불교의식과 함께 그 제작이 보편화됐다. 이 불연의 형태는 난간을 두른 집 모양으로 앞뒤에서 사람이 들 수 있게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러한 모양은 대부분의 불연이 갖는 공통된 형태이지만, 세부의 표현이 사실적이며, 조각기법이 매우 정교하다.

특히 받침대 밑면의 조련기(造輦記)와 시주질(施主秩) 명문은 이 작품이 조선 현종 11년(1670)에 제작됐음을 알려 주어 현존 최고의 것임이 판명됐다.

일반적으로 불교공예품은 그 제작연대를 잘 알 수 없는데, 이 불영사 불연은 유물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해 한국불교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여겨져 소개하게 됐다.

그동안 학계에 불영사에는 1채의 불연의 몸채 사진 1장과 바닥명문 사진 1장만 실으면서 사진 설명에 간단히 강희 9년(1670)에 만들었다는 내용만 적고 있다.

이후 불영사의 이 불연이 우리나라 사찰에 남아있는 불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게 됐다.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2001년 10월 23일 불영사주지인 일운스님의 허락을 받고 불영사가 소장한 유물들을 조사하던 중 불연이 1채가 아니라 2채인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또 조사과정에서 새로 발견한 불연의 받침대 밑면에도 명문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이에 새로 발견한 불영사의 불연과 조련기 등 명문의 판독 및 번역을 시도하고 자세한 불연의 현황을 소개하기로 했다.

◇불영사 불연 현황
불연은 가마의 일종으로 왕실에서 사용하는 ‘연’이나 ‘덩’과 비슷한 것으로, 절에서 시련의식에 사용하는 불교 의식구의 일종이다.

시련은 가마를 문 밖까지 메고 나가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이나 재(齋)를 받을 대상인 영가 등을 가마에 모시고 여러 가지 위의(威儀)를 갖추어 법회장소(도량)까지 행렬을 지어 오는 불교의식으로 이때 불연이 사용된다.

시련의식에는 불·보살을 의식도량에 모셔 와서 돌려보내는데 필요한 불연과 행렬에 필요한 나팔, 각종 번 및 기치류가 있다.

이렇게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의식구는 불교적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구상성(具象性)을 지니는 불교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불연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불교의식과 함께 그 제작이 보편화됐다.

현재 불영사에는 2채의 불연이 있는데, 매년 석가탄신일 때 아기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을 행하고 있으며, 이때 이 불연을 사용하고 있다.

◇불연
불연은 크기는 높이 125cm×난간 폭 86cm×총길이 311cm이며, 형태는 전체적으로 난간을 두른 집 모양으로 생겼는데, 안에 물건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앞뒤에서 4명이 밑에 붙은 가마채(손잡이)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서 운반하게 되어 있다.

즉 사람이 들 수 있도록 한 긴 손잡이 위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한 사각형의 몸체를 올리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모습이다. 이 불연은 받침대, 몸체 그리고 지붕의 세 부분이 각각 분리될 수 있게 조립했다.

받침대는 몸체를 올려놓기 위한 누각의 난간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으며, 앞뒤에 두 개씩 네 개의 긴 손잡이를 만들어 맨 끝에 용머리(龍頭)를 조각했다.

난간에는 연꽃이 장식됐으며, 사방 모서리에는 생동감 넘치는 용머리를 장식해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받침대와 손잡이 부분에는 붉은 칠을 했다.

몸체는 네 기둥에 창이 있는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려놓았다. 양측면 창에는 육각형의 그물망을 치고 그 중앙에 원형의 청동판(지름 14.9cm)을 달았으나 현재 한쪽만 남아있다. 앞뒤면 창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벽체에는 화려하게 여러 가지 꽃문양을 양각이나 음각해 채색했다. 지붕은 둥근데, 바깥은 녹색비단으로 처리했으며, 상부에는 노란색 복련 위에 붉은색의 연봉을 세워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지붕의 네모서리에는 봉황의 머리를 끼울 수 있게 구멍을 뚫었는데, 지금은 3개의 봉황장식품만 남았다. 내부에는 그물처럼 대나무를 엮어 지붕의 골격을 이루었다.

불연의 받침대 밑면에는 조련기를 묵서(墨書)했다. 세로로 계선(界線)을 그었으며, 그 안에 해서체로 글을 적었다.

서체의 장법(章法)은 세로 간격의 여백이 가로 간격의 여백보다 약간 넓고 세로줄은 맞았으나, 가로줄은 맞추지 않은 행서(行書) 장법이다. 글자의 크기는 거의 모두가 비슷하다.

현재의 상태는 지붕이 찢어지거나 창의 그물망이 찢어진 곳도 있으며, 각 부재의 조립이 느슨해져 있는 등 일부 훼손이 있으나 원상을 대체로 잘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화려하며 뛰어난 조각수법을 볼 수 있는 귀중한 목조공예품이다.

불연는 크기는 높이 125cm×난간 폭 80cm×총길이 303cm이며, 형태는 불연과 거의 동일하나, 손잡이 끝의 용머리는 앞쪽에만 장식됐다.

지붕의 네모서리에 꽂아 장식하는 봉황장식은 1개만 유존하는데, 불연보다 작고 모양도 다르다. 받침대 밑면에는 시주질을 묵서했는데, 계선은 긋지 않았다.

글씨는 해서체로 서체의 장법은 행서장법이나, 대부분 가로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글자의 크기는 거의 모두가 비슷하다. 시주질을 위에 쓰고 사내질을 그 아래에 썼다.

이것의 현재 상태도 지붕이 일부 찢어지거나 창의 그물망이 모두 없어졌으며, 각 부재의 조립이 느슨해져 있는 등 일부 훼손이 있으나 원상을 대체로 잘 유지하고 있다.

◇불영사 불연 조련기 판독과 역문
불영사 불연의 조련기 및 불연의 시주질 판독과 역문은 다음과 같다. 원문에는 일부 古字가 있어나, 판독문에서는 현재 사용하는 글자로 바꾸었다.

삼가 봉연(鳳輦)이라 하는 것은 법회를 여는 때에 수많은 부처들이 올라앉아 궁전으로 내임(來臨)하던 것이라.

그러나 어찌 한갓 그러한 것이기만 하랴! 항차 난봉(鸞鳳)이 꿈틀대며 난간 중에 날아오르고, 황룡이 용솟음치며 청연(靑蓮) 위로 솟아오르며, 십이진금(十二眞金)으로 벽을 장식하고, 칠보명주로 지붕을 얽고, 둥그런 명월과 같은 거울이 앞뒤로 걸려 있으며, 수놓은 작은 문을 열면 운영(雲影)이 누각에 내리고, 작은 보석으로 장식한 창을 열면 일월이 궁전을 비추는 것 같음이라.

위대하고 장함이요, 찬연히 빛남이로다. 세상에 이 물건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학종선덕(學宗禪德)이 바로 이것이로다. 무신년 가을에 소매 속에 옥축(玉軸)을 갈무리하고 길을 떠나 경상도 울산부에 이르렀다.

온갖 마을에 바람이 거세고 구름이 젖어들거늘 적선지가(積善之家)의 선연(善緣)을 맺게 하고, 홍공(鴻功)을 이루고자 했지만 좋은 장인을 만나지 못해 한세월을 그냥 보냈다.

기유년 봄에 홀연히 좋은 장인을 만났으니, 그 때 마침 춘북령 원적산 대승암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공업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경술년 봄에 결단을 내림으로써 서로 인연을 맺게 됐다.

이는 가히 사람의 소치가 아니라 하늘이 하는 바라. 옛날에 이르기를 大運이 도와 두루 미치지 못하면 정성만 거듭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했다. 가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러니, 이는 덕을 쌓고 능히 베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삼가 원컨대 불연(佛輦)을 조상한 후에 귀신이 용을 호위하여 하늘에서 지키고, 삼재(三災)와 오해(五害)가 모두 끊어져 들어오지 못하며, 육시(六時)와 천락(天樂)이 무성하게 절로 내임하여 불일(佛日)이 거듭 빛나고 단풍이 다시 떨치게 하소서!

지금까지 불영사 불연의 현황과 조련기 및 시주질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그동안 한국불교조각사에서 불연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분야다.

즉 해인사에 3채, 수타사 1채, 영은사 1채, 통도사 2채 등이 있는데, 아직까지 그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 마곡사에도 1채가 있는데, 이것은 불연이 아니라 세조임금이 당시 타고 왔던 가마라 전한다.

이번에 추가로 발견된 불영사 불연은 그런 의미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유물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 자료의 소개가 앞으로 불교공예사의 연구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하며, 그 의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불연의 조성년대가 기록되어 있어 유물의 양식편년(절대년대)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불연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강희 9년 4월에 만들었다. 강희는 중국 청나라 성조의 연호이므로 강희 9년(경술년)은 조선 현종 11년인 1670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2채의 불연은 1670년 4월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사찰에 남아있는 불연이 대부분 조선후기의 것인데, 이 불영사의 것은 현재 확인된 것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유물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파손된 부분도 있고 부분적으로 채색이 흐려지기도 하였으나, 원형을 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앞으로 불연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불교공예사적 자료가 된다.

둘째는 명문에 가마 조영의 사실을 적고 공역에 관계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쓰며, 끝에 완성시기를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 의식구의 조영동기, 조영에 참여한 승려 등의 이름을 알게 되어 불영사의 승려계보와 역사를 규명하는데 매우 귀중한 문헌적 자료가 된다.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는 “우리나라 사찰에 남아 있는 불연은 대부분 조선 후기인 것으로 그 제작연대를 잘 알 수 없는데, 불영사 불연은 유물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며 “보존상태가 양호해 한국불교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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