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령 오적 마애비 발견보고를 겸해-장기영(울진군보건소 보건사업과 근무, 울진향토사연구회 연구위원 겸 사무국장)
울진군에는 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비롯해 천연기념물 제155호 ‘울진 성류굴’에서 삼국시대 명문이 발견되는 등 다양한 금석문이 알려져 있다.
최근 조선시대 18세기 초 강원도 울진현령을 지낸 오적의 마애비가 울진군 북면 응봉산에서 발견됐다.
지난 2019년 4월 13일 장기영씨가 응봉산 내 덕구계곡 경로에 있는 덕구온천 원탕에서 발견하고, 이와 관련된 덕구온천의 역사와 유래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1. 울진현령 오적 마애비의 명문과 번역
울진현령 오적의 마애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덕구2리 산 1-1번지’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온천수가 용출하는 덕구온천 원탕(해발 275m)이 있는 곳으로 응봉산(해발 998.5m) 정상으로 올라가는 루트인 덕구계곡에 포함된다.
원탕에는 남쪽에 산신각이 있으며, 산신각 뒤에는 큰 암벽이 수직으로 편평하게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다. 오적 마애비는 이 암벽의 왼쪽으로 치우쳐 새겨져 있다.
오적 마애비는 테두리만 굵게 선각한 원수형이다. 비의 너비는 58㎝, 왼쪽 측면 비신 테두리의 길이는 95㎝, 오른쪽 측면 비신 테두리의 길이는 80㎝이다. 명문은 마애비 내부와 외부로 나뉘어 음각되어 있다. 마애비 안에는 세로 8줄의 명문이 있다.
1행은 비의 제목을 크게 적었으며, 나머지는 작게 적었는데 2∼7행은 내용이며, 8행은 새긴 시기와 글쓴이를 기록했다. 글자 수는 1행 9자, 2행 12자, 3행 12자, 4행 12자, 5행 12자, 6행 8자, 7행 8자, 8행 17자로 모두 90자이다. 마애비 밖에는 명문을 왼쪽에 협서했는데, 모두 2행이다.
1행은 4자를 세로로 새겼는데, 마지막 4번째 글자에서 가로로 우서해 1자를 연결, 2행을 이뤘다. 글자 수는 1행 4자, 2행 1자로 모두 5자이다.
외부의 명문은 마애비 내부를 먼저 기록한 후 추가한 것으로 판단된다. 명문은 마애비 내부 90자(8행), 외부 5자(2행)로 모두 95자며, 서체는 해서체이고 글자의 크기는 큰 것은 가로 18 × 세로 17㎝ 정도이다. 이 마애비의 명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縣令吳勣 療病來沐浴 현령 오적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하러 오다.
嵩高維岳 毓靈貯精 높고 높은 험한 산에 영험한 정기 모여
瀉出玉流 利澤流行 옥 같은 물 솟아나니 이로움이 넘쳐나네
今吾一疾 靡神可祈 지금 나의 한 가지 병 치료할 길 없었지만
(중략)
前後淸澗 左右石扉 앞뒤로는 맑은 계곡 좌우로는 돌문[石門]인데
序屬令節 浴乎詠歸 좋은 계절 만났으니 목욕하고 돌아가네
(후략)
이 명문은 1연에는 온천수에 대한 소문, 2연 병 치료에 대한 기대, 3연 온천을 위해 가는 과정, 4연 목욕 후의 만족감을 표현했는데, 원탕에 온 목적과 감흥, 비문을 찬한 사람, 병명, 원탕의 풍경, 같이 온천욕한 사람, 명문을 새긴 시기 등이 보인다.
특히 명문의 주인공인 현령 오적은 관동지(1829~1831), 관동읍지(1871), 강원도지(1941), 울진군읍지(1899), 울진군지(1938) 등에 1715년(숙종 41) 9월∼1716년(숙종 42) 12월까지 울진현령을 지냈으며, 옥구(전북 군산) 출신으로 확인돼 각석문의 정보가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마애비에 쓰인 ‘병신년’은 오적이 울진현령 재임기간 중 병신년(1716)인 것이다.
즉 이 명문은 오적이 울진현령을 지내던 중 1716년 8월 21∼30일 사이 병(중풍)을 치료하기 위해 조여용과 함께 덕구온천 원탕에 등산해 온천욕한 후 이를 기념해 바위에 새겼던 것으로 일종의 ‘온탕비’라 할 수 있다.
디지털군산문화대전에서 울진현령 오적은 전북 군산지역(옛 옥구현)에 세거한 장흥 오씨 한성판윤공파 출신의 문관으로 1656년(효종 7)에 태어나 1710년(숙종 36)에 사망했다. 1681년(숙종 7) 식년시 문과에 병과 19등으로 급제했다.
문과급제 이후에 창악찰방, 문천군수, 울진현감, 양산군수, 통례원 상례원 겸 춘추관기사관, 동궁훈도 등을 지냈으며, 증직으로 형조참판을 수여받았고 묘소는 전북 군산시 회현면 세장리 류동에 있다.
즉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1710년 이후인 1715년 9월~1716년 12월에 울진현령을 지내고 있으며, 또 1716년 8월에는 덕구온천 원탕에서 온천욕도 하고 있는 1차 사료인 금석문이 확인돼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사망년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승정원일기 1718년(숙종 44) 2월의 ‘丙申條의 收租를 감축한 수령 중에 박휘등 등은 의금부에 옮겨 처치하고 남적명 등은 거론하지 말 것을 청하는 刑曹의 準目’ 기사에서 오적은 당시 이미 사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오적은 울진현령에서 좌천된 1716년 12월 이후~1718년 2월 25일 사이 사망한 것이다.
즉 그는 1716년 8월 당시 ‘중품(中風)’이라는 병을 갖고 있었지만 덕구온천 원탕까지 등산해 온천욕을 할 정도의 건강은 유지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울진현령에서 좌천된 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716년 12월 울진현령에서 좌천된 것도 丙申條(1716)의 收租를 감축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통덕랑 권후는 향리직으로 지방관을 보좌하는 행정 실무자였는데 덕구온천 원탕까지 수행해 글을 썼던 것이다.
또 함께 동행, 온천욕한 조여용은 승정원일기 1709년(숙종 35) 4월의 ‘최석정이 간행한 類編에 대해 최근에서야 배척하는 이유를 진술하고 유편을 불사르고 최석정을 파출하고 최석정을 비호한 윤성준에게도 벌을 내릴 것을 청하는 박광원 등의 상소’ 기사에서 聯名한 인물 중 같은 이름이 幼學 항목에 보인다.
이 기록 시기와 덕구온천 원탕 각석문의 조여용에 계급이나 직책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幼學’으로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조여용은 울진현령의 행정적 수행원이 아니라 유학으로서 교유의 상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마애비에 오적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오적의 직책에 대한 위계를 구분하기 위해 마애비 외부에 적은 것으로 판단된다.
2. 덕구온천의 역사와 유래
울진군에는 현재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이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그 온천수의 성분은 서로 다르다. 특히 덕구온천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덕구리 응봉산 일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강원도 울진현에 해당된다.
덕구온천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종실록지리지(1432) 강원도 울진현에 “온천은 현의 북쪽 44리 흥부역 서쪽 구수우물산동에 있다”라고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국여지지(1656), 대동지지(1862∼1866) 등 다수가 확인된다. 이는 덕구온천이 조선 초 1432년 이전에 이미 온천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러한 덕구온천은 당시 울진현의 유일한 온천으로, 덕구온천이 있었다는 문헌기록이 이번에 발견된 울진현령 오적 마애비에 의해 다시 입증됐다. 또 울진현령 오적 마애비는 덕구온천 원탕의 정확한 위치가 지금의 위치와 동일함도 확인 시켜준다.
덕구온천의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 말∼조선 초에 덕구온천이 발견됐음을 보여주어 그 역사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덕구온천 발견 시기는 조선 초 1432년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나오므로 어느 정도 신빙성은 보인다.
현대의 기록 중 처음 유래에서는 200여 년 전이라 하여 조선 후기라 했으나, 그 후 고려 말(또는 조선 초)로 시기를 올린 것은 나중에 세종실록지리지를 보고 그 근거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발견 시기를 조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덕구온천 원탕에는 “약 600여 년 전 고려말기 때 사냥꾼들이 사냥을 하다가 큰 멧돼지를 큰 상처를 입혔으나, 상처를 입은던 멧돼지가 어느 계곡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쏜살같이 사라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사냥꾼들이 계곡을 살펴보니 자연으로 용출되는 온천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때부터 덕구온천이라 했다.(하략)”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온천에 관한 유래는 백로, 학 등의 야생조류 또는 노루·사슴 등의 짐승을 사냥할 때 상처 입은 동물이 탕욕을 하여 치료되는 광경을 보고 발견했다는 ‘동물의 발견’ 전설이 대부분이다.
이상에서 조선시대 울진현령 오적 마애비의 명문을 소개하고 울진 덕구온천의 역사와 유래를 살펴보았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울진군에는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이 있다.
특히 덕구온천은 칼슘, 칼륨, 철, 염소, 중탄산, 불소, 나트륨, 마그네슘, 탄산 등이 함유된 약알카리성 탄산천으로 온도 42.4℃의 자연용출 온천수다. 그 효과로는 신경통, 류마치스성 질환, 근육통, 피부질환, 중풍, 당뇨병, 피부미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2019년 4월 13일 이 덕구온천 원탕에서 18세기 초 강원도 울진현령을 지낸 오적의 마애비가 장기영과 진호 부자에 의해 발견됐다.
이 마애비는 오적이 울진현령으로 있을 때 조여용과 함께 1716년 8월 하순에 중풍이라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응봉산 덕구온천 원탕까지 등산해 온천욕 한 것을 기념하여 새긴 온탕비다.
이는 울진현령을 지낸 오적이라는 인물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덕구온천의 유구한 역사와 문헌기록을 입증해주는 금석문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덕구온천은 문헌기록과 전설에서 고려 말∼조선 초에 이미 온천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덕구온천의 발견 유래도 크게 다섯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 유래에 대한 다양한 인식 변화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 덕구온천은 우리나라 다른 지역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사냥꾼이 ‘사슴’, ‘멧돼지’ 또는 ‘노루’를 사냥하다가 발견하였다는 동물의 발견에서 시작됨도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