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지진피해 보상 주어진역학 최선을 다하겠다
허상호 회장은 장기 시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린 허 회장의 당면한 문제는 가난을 극복하는 길이었다.
18세 어린 나이에 해병대를 자원한 것도 가난 때문이며 그곳에서 세상을 배우고 가난 극복을 깨우쳤다. 사업에 성공한 이후에는 또 다른 도전이 있었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공부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 입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업을 하면서 석사학위까지 받은 열정은 도전정신과 강한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 회장의 학구에 대한 열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을 비롯해 연대, 고대 카이스트 등의 경영대학원도 무섭게 다녔다. 인맥을 쌓으면서 한편으로는 배우지 못했던 한을 푸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사업의 성공열쇠는 강한 도전과 빠른 결단력, 그리고 추진력, 헝그리 정심이 함께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편집자주)
◆가난은 한 인간의 꿈과 희망,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했다
Q. 자수성가한 불굴의 사업가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A.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성공한 사람’ 또는 ‘입지적인 사람’이라고 묻기도 하고 칭찬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와닿지도 않고 기분 좋은 말도 아니다. 나는 스스로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나 스스로가 이제는 성공할 수 있는 준비가 돼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정도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아픔과 좌절, 눈물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를 견뎌내면서 피와 땀으로 일궈온 질곡의 세월이었다.
열정과 도전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 끈질긴 승부사의 정신이 오늘을 만들어 낸 원천이다. 선택이 운명이란 말처럼 주택 건설업이 나의 천직이라 생각했고 성격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항상 완벽주의자가 되기를 노력하며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위기관리 능력이었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기에 미래에 벌어질지도 모를 모든 위험 상황에 대비하는 대응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는 능력을 기르고 습성을 길렀다.
Q.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것 같다. 더 구체적인 일화를 얘기해주면 좋겠다.
A. 어렵게 살았다.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탄생인데 어쩌다 태어난 곳이 장기면 석촌리 피폐한 농촌 두메산골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농부였고 태어나 자라면서 워낙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적 소년 사절에 그 가난이라는 것은 참 두렵게 느껴졌다.
가난은 한 인간의 꿈과 희망,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했고 가질 수 없게 했다. 처절한 공포에 짓눌려 살았기에 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난이란 공포에 짓눌려 딸 다섯에 아들 둘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벗어나느냐 이것이 첫째 과제였다.
어릴 때 상상을 많이 했다. 미래에 대한 공상의 꿈을 많이 꿨다. 끊임없이 미래에 대해 허상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시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군대를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빨리 갔다 오자는 생각이다. 그 당시 꿈은 큰 농장, 땅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18살에 해병대를 지원했다.
해병대에 지원해서 갔다 온 것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 됐다.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해병대 훈련을 받고 바로 사령부로 갔는데 사령관실에서 별들이 움직였다. 작전하고 의전, 행동, 말 모든 것에 새로운 천지를 보게 됐다.
3년간 인생 공부를 했고 다 배우게 됐다. 성공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배우게 된 것이다. 산 경험이다. 지금도 당시의 해병대에서 배운 가치관을 지금의 사업에도 도입하고 있을 정도다.
제대할 즘 병장 달고 아내를 만난 것 두 번째 전환점이다. 아내 김태열 씨는 내 인생의 엄청난 모험이었다. 이뤄질 수 없는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맨주먹밖에 없었고 그에 비해 아내는 당시 약국도 소지하고 있고 경제적 차이가 너무나도 큰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나를 믿어주었고 이뤄질 수 없는 결혼도 하게 됐다. 내 인생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으며 잘한 선택이라 확신한다. 이제는 제대를 하고 뭘 먹고 살아가느냐 싶어서 군복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보이는 것은 전봇대와 벽에 ‘집 구합니다’ 표시. 제대를 1971년도 했는데 파일 박는 소리가 시내에 들릴 정도였다. 당시 제철소라는 화수분이 포항에 떨어져 근로자들이 물밀 듯이 구름같이 포항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선택이 운명인데 ‘집 장사’를 하자. 포스코의 건설과 나의 사업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주택건설업을 결정한 것이 세 번째 전환점이다. 이에 나의 성격이 운명을 결정했다는 것도 느끼게 됐다.
나의 결단력, 도전정신, 헝그리정신, 추진력이 사업과 융화됐다. 건설업은 속된 말로 깡이 없으면 못한다. 의지, 추진력, 돌파력, 남보다 빠른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포스코가 기회를 줬고 내 성격이 그 기회를 잡았다.
이거다 싶어서 기회를 잡고 먼저 단독주택을 260세대를 기와집 수준으로 쌓아서 올렸는데 짓기 전에 팔리고 또 짓기 전에 팔렸다. 밑천이 없어서 모든 가용할 수 있는 돈을 모아 한 동 짓고 팔고 또 한 동 짓고 팔고 집 장사를 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영남주택을 설립했다. 돈이 없으니 시내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오천 등 변두리에 서민주택을 많이 지었다. 영남주택을 10여 년 정도 했는데 명칭 때문에 지역적인 한계가 있어 상호를 삼도로 변경하게 됐다.
삼도로 하면서 뷰엔빌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삼도는 석 삼(三), 도읍 도(都)를 쓴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삼한이라고 했다. 삼한일통이라는 말처럼 삼도는 큰 뜻을 품고 있다.
삼도를 설립한지도 27년이 됐으며 올해 영남건설까지 창립한지 36년째가 된다. 나는 급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생각은 충분히 결정은 단번에 내렸고 한 계단 한 계단 지금도 올라가고 있다.
지금도 그래서 배우고 있다. 배우고자 하는데 한이 맺혔다. 독학도 열정적으로 해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나왔다. 보석은 닦을수록 빛나듯이 인간도 갈고 닦아야 한다. 부라는 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Q. 사업체 경영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포항범시민대책위원회 공동의장 등을 맡고 있는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A. 나는 스스로 ‘일벌레’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지난 40년 동안 아침 4시에 기상해 하루일정을 정리하고 헬스장에서 1시간 정도 운동한 후에 회사에 출근한다.
특별히 건강관리는 하고 있지 않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다. 수많은 스트레스는 피하지 않고 받아서 해결해버린다. 아픈 상처는 즉시 잊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감사하고 고마운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나 스스로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옛 성현의 말씀에 “재앙은 입에서 생기고 근심은 눈에서 생기며 병은 마음에 생긴다”는 말처럼 정신과 육체를 스스로 굳세게 관리하고 있다.
◆포스코가 잘 되기를 희망하지만 환경문제 대한 포스코의 자세 실말스럽다
Q. 포항지역발전협의회 회장으로서 지역발전을 위한 포스코의 역할은 어떤 것이며, 환경문제를 야기한 포스코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A. 지역발전을 위한 포스코의 역할은 포스코가 포항시민의 뜻을 외면하지 않고 말로만 상생·협력을 강조하지 말고 지난 50년 동안 동고동락한 포항시민과 진정한 상생·협력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지난 2018년 4월 24일 창립 50주년을 맞은 포스코에 대해서 포항시민은 ‘배신감’이란 극한 표현을 쓰며 포항지역발전협의회와 30여 개의 지역사회단체가 함께 시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포스코는 포항시와 진정한 상생발전 방안을 제시 할 것을 촉구한 바가 있다.
50년 전 우리는 포항이 철강산업단지로 지정됐을 때 우리는 발전하는 내일의 포항을 기대하며 조상대대로 뼈를 묻고 살아온 집과 농토를 아낌없이 내주었다.
포스코가 지난 50년 동안 경제적 가치를 얻어냈다면 우리 포항은 경제적 가치로 살 수 없는 자연의 가치를 모두 잃어 버렸다는 것을 포항시민은 잘 알고 있다.
또한, 지난 50년 동안 우리 포항시민은 포스코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한없이 성원하고 협력했으며 50주년을 축하했다.
그러나 이번 포스코 고로 조업 폭발장치(브리더)와 전로가스에서 나오는 환경공해를 포항시민은 모르고 먹고 살고 있었다 생각하니 배신감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포항철강공단의 환경오염은 불법과 탈법으로 행정기관은 적발하고도 묵인한다는 보도를 보고 더욱더 심각하게 생각한다.
포스코나 철강공단은 이번 사태를 봉합하려 하지 말고 반성과 깊은 사과를 해야 할 것이고 공해환경 개선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시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포스코는 포항시민에게 100년을 악속할 수 있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돌려주기를 희망
Q. 포스코의 차세대 사업인 이차전지사업이 광양에 집중하고 포항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한 마디 해 달라.
A. 포스코 50년 역사와 함께 포스코의 본향인 포항시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세계적인 철강기업 글로벌 포스코를 탄생시킨 위대한 시민으로서 포스코의 신화창조에 동참할 것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협의회는 포스코가 세계적인 기업사냥꾼들의 표적(적대적 인수합병 M&A)이 돼 기업경영이 극심한 도전을 받을 당시 ‘범시민 포스코 주식 1주 갖기 운동’에 적극 동참해 M&A 저지 운동을 확산시킨 바 있다.
민주노총의 지원을 업은 지역건설노조의 포스코 본사 불법 점검사태도 시민과 힘을 모아 해결했다. 또한 포스코의 신제강 공장신축 당시 비행구역 고도제한 완화, 4세대 방사광 가속기 유치를 비롯해 최근 정부의 정책으로 무산된 청정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포항시민연대 서명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30만 서명으로 시민의 뜻을 모으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역사회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포스코의 크고 작은 현안에 동반자적 지지와 우호적 성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포스코의 발전이 지역은 물론 국가의 발전이라는 기본적 인식의 바탕 위에서 포스코와 고락을 함께 해왔다.
지금 포항은 지난 11월 15일 지진발생 이후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진으로 인한 인구감소와 투자심리 위축, 도시브랜드 손상, 관광객 감소 등 시민의 재산적, 정신적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시기에 포스코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도 포항에 투자를 외면하고 광양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포항시민은 알고 있다. 포항시민은 배신감을 넘어서 불신과 분노를 가지고 있고 포스코를 보는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본다.
포스코가 포항시민들이 믿고 함께 미래 100년을 약속할 수 있도록 희망찬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포항지진피해 보상 관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Q. 포항범시민지진대책위원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지진특별법제정과 지진피해 보상에 대해서 어떤 대책을 수립하고 있는가.
A. 지난 3월 20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포항지진은 촉발지진으로 밝혀졌다. 그 후 긴급한 현실을 인식하고 시급한 현안을 우리 포항시민들이 해결하기 위해 ‘범시민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리 스스로 무너져 있는 포항을 어떻게 세우고 살려 나가느냐를 협의하고 시민들의 뜻과 의견을 모아 80여 개 단체와 각계각층 여·야 정치는 물론이고 종교계, 노동계 등 범시민단체가 함께 참여해서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돼 포발협회장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있다.
범대위에서 수많은 현안과 과제를 만들어 내고 풀어가고 있으며 김정재 의원이 특별법 제정 입법 발의를 해두고 있고 하태경 의원도 입법 발의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국회가 열리고 민주당에서도 법안을 내 놓으면 잘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피해보상은 특별법 속에 정신적 육체적, 재산적 피해보상금을 구체적으로 분리해서 정리될 것으로 보고 범대위에서는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