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모시·소곡주의 고장, 근현대사의 숨결 깃든 충남 서천

▲ 바닷가에 있는 장항송림산림욕장
한산모시와 장항선은 들어봤지만, '한산'과 '장항'이 충남 서천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전북 장수에서 시작해 천리를 굽이쳐온 금강이 서해와 만나 명을 다하는 곳에 서천이 있고, 그곳에 한산면과 장항읍이 있다.

생각보다 볼 것도 많고 사연도 많은 동네다.

◇ '이골'의 슬픈 유래


어떤 일에 아주 익숙해질 때 흔히 쓰는 '이골이 난다'는 표현은 뜻밖에도 전통 모시 제작에서 유래된 말이다.

다년생 식물인 모시풀의 속껍질을 벗기고 햇볕에 말려 태모시를 만든 뒤 이를 잘게 쪼개서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데, 이 작업을 '모시째기'라고 한다.

예로부터 모시째기는 도구 없이 아낙네들이 입에 물고 직접 이로 작업했다. 아랫니와 윗니로 모시를 물어 쪼개다 보면 피가 나고 이가 깨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에 골이 파지게 돼 모시째기가 수월하게 되는데 이를 '이골이 난다'고 했다.

한반도에서 모시를 옷감으로 사용한 것은 삼한 시대로 추정된다. 2천년 모시 생산 노동의 역사가 스며든 단어 '이골'은 민초들의 삶을 위한 투쟁의 산 증거다.

국내 모시 산지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충남 서천군 한산에 가면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이 이골이 나도록 만들고 입어온 모시의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할 수 있다.

한산은 고대부터 모시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때 모시를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구전으로는 한 노인이 약초를 캐기 위해 서천 건지산에 올라가 처음 모시풀을 발견했다는 얘기가 있다.

높은 연평균 기온, 4∼9월에 집중되는 강수량, 다습한 환경, 나지막한 산세 등 서천의 기후·지리적 환경은 모시를 재배하고 생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모시는 합성섬유에 비해 통풍성, 땀 흡수력, 내구성이 좋아 예부터 최고의 여름 옷감이었다.

한때 서천군에는 1천명이 넘는 모시 관련 생산자가 있었지만, 일이 고되고 수익은 적어 현재는 한산모시조합원 60여명을 포함해 200여 명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녹음 짙은 건지산 기슭에는 크고 작은 한옥들이 고즈넉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한산 모시의 역사 공부에서부터 체험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한산모시관이다.


본관에 들어서면 공기는 쾌적하고, 콘텐츠는 알차고 흥미롭다. 모시의 수확부터 모시째기를 거쳐 의복과 공예품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생생했고, 모시로 만든 시대별 전통의복은 꺼내 입고 기념사진이라도 찍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전시돼 있다.

뭐든 직접 해보지 않고는 직성이 안 풀리는 사람들은 건너편 체험관으로 가면 된다. 모시 미니 베틀 짜기, 모시 쿠키 만들기, 모시로 된 문구 제작, 한산 모시옷 입어보기 등 체험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당연히 살 수도 있다. 천연 모시는 물론 모시의 장점을 지니면서도 구김, 세탁 등이 자유로운 각종 현대 모시 제품을 판매한다.

서천군청 오대석 모시소곡주팀장에 따르면 군청은 한산의 모시 산업 부흥을 위해 재배 면적을 늘리고 태모시 수매가를 인상하는 등 지원책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산에는 모시 말고 유명한 게 또 있다. 찹쌀로 빚은 전통술 한산소곡주다.

636년 백제 무왕이 백마강변에서 신하들과 소곡주를 마셔 그 흥이 극치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 멸망 당시 유민들이 나라 잃은 한을 달래기 위해 한산 건지산 주류성에서 하얀 소복을 입고 빚어 소곡주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산모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산소곡주갤러리에 가면 사전 예약을 통해 소곡주 빚기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산에서 소곡주를 빚는 67가구의 제각기 다른 소곡주를 살 수 있고, 20여 종을 무료 시음할 수도 있다.

◇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장항하면 보통 '장항선'과 '장항제련소'를 떠올린다.

1931년 개설된 장항선은 충남 천안과 장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1922년 천안∼온양 구간이 먼저 개통됐고 1931년 8월 장항까지 전 구간이 완성됐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수탈한 곡식을 장항항을 통해 일본 오사카로 반출했다. 미곡을 배에 싣기 전에 보관하던 미곡 창고가 아직 남아있다. 2008년 장항∼군산 연결선이 개통하면서 종착역은 장항역에서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장항제련소도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1936년 일제가 세웠다. 국제결제수단으로 일제는 금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금 광산과 대규모 제련소를 곳곳에 세웠다.

대일 곡물 출항기지이자 비철금속 제련의 거점으로 전국에서 많은 산업 노동자들이 몰려들던 장항이 이제는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작고 깔끔한 문화·역사 관광 도시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장항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꼽히는 '장항 도시탐험역'은 옛 장항역이다. 2008년부터 화물역으로 운영되다가 2016년부터는 역의 모든 기능이 멈춰 섰다.

지역 주민들은 숙의 끝에 역사(驛舍)를 복합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알록달록, 밝고 화사한 색깔과 무늬들, 현대적 디자인으로 단장한 도시탐험역은 온전히 지역 주민과 방문객들을 위한 휴식·문화 공간이다.

그리 크지 않은 2층 건물은 아늑하고 편안하다. 어린이들이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보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지역의 역사와 이야기들을 쉽고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장항이야기뮤지엄, 각종 모임과 강좌 등을 위한 카페와 라운지도 있다.

뮤지엄 안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높이 18m의 전망대가 있다. 장항 시내가 한눈에 잡힌다. 저 멀리 옛 장항제련소의 굴뚝과 금강하구도 보인다. 평일이라 그런지 차도엔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려와 조금 걸으면 60년대생부터 80년대생까지 모든 연령대가 행복해한다는 '장항 6080 음식골목'이다. 꽃게, 아귀, 홍어, 조개, 박대, 물메기, 복어, 주꾸미 등 장항 앞바다에서 잡은 갖가지 해산물들이 기다리고 있다.

레트로한 분위기의 카페에선 안 마셔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마신 사람은 없다는 '달고나 라떼'도 맛볼 수 있다.

만약 이 한적하고 오붓한 옛 도심을 자전거로 누비고 싶다면, 대여소에 신분증만 맡기면 3시간 동안 무료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초여름의 열기가 스멀거리는 장항의 벌판엔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위로 외로운 잡풀이 듬성하다. 번성했던 미곡 수출항이었음을 아는 사람들에게 장항의 풍경은 쓸쓸하다. 장항을 보는 포인트다.


◇ 1만2천 해송 사이로…

관광코스의 처음이 됐든 마지막이 됐든, 빠뜨린다면 반드시 후회할 곳은 장항송림산림욕장과 스카이워크다.

차에서 내려 빽빽한 소나무숲에 발을 내딛는 순간, 자연이 만든 청량한 공기에 살갗이 먼저 반응한다. 1만2천 그루의 해송과 그 밑에 깔린 370만 본의 맥문동, 그 사이로 산책로가 정갈하게 이어진다. 다들 보는 순간 탄성을 내지른다.

좀 지나니 한켠에 초록빛 맥문동과 어우러진 분홍빛 송엽국이 화사함을 더한다.

혼자라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워질 그 길을 꿈처럼 걷다 보면 이 고장 출신인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새긴 시비가 이정표처럼 나타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숲의 끝에는 바다와 갯벌이 거짓말처럼 펼쳐져 있다. 이 바다가 바로 그 유명한 '기벌포 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기벌포 전투는 총 3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660년 백제와 나당연합군, 663년에 백제부흥군-일본 연합군과 나당연합군, 676년엔 신라와 당나라가 이곳에서 싸웠다. 한반도 패권을 놓고 벌어진 국제전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도 큰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는 스카이워크에 서면 천연기념물 '검은머리물떼새'가 산다는 유부도가 보이고 그 남쪽으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육지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군산이다.

군산을 여행하면서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던 땅을 볼 수 있었는데, 그곳이 서천 땅이었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채만식의 장편 소설 '탁류'에는 이런 흥미로운 부분이 나온다. "…그는 시치미를 뚜욱 떼고 앉아, 들은 풍월로 강 건너 장항이 축항까지 되면 크게 발전이 될 테고, 그러는 날이면 이쪽 군산이 망하게 된다고 태수한테 그런 이야기를 씨부렁거리고 있고…"

읽으면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군산과 장항이 지금도 경쟁하는 도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군산에 와서 금강 건너편을 한번 본다면, 그냥 돌아갈 것이 아니라 이곳 서천도 들러 두루 구경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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