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4월부터 3개월간 무제한 유동성 공급에 나선다. 은행이나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보유한 우량 채권을 담보로 발행하는 환매조건부채권(RP)을 원하는 만큼 사들이기로 했다.

중앙은행이 공개시장에서 금융회사 RP를 사들이면 매입액만큼의 유동성이 시장에 흘러 들어가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들의 숨통을 터주어 도산을 막을 수 있다.

한은의 RP 무제한 매입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사용하지 않았던 전례 없는 고강도 조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유발된 실물·금융 분야의 경제적 충격이 단기간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판단에서 나온 한국형 양적 완화로 볼 수 있다.

천문학적인 금융지원 프로그램에도 금융회사에 지원할 돈이 모자란다면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수요자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은이 전례 없는 카드를 내놓은 것은 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려는 목적이 가장 클 것이다.

한은이 길을 터줬지만 이번 조치로 시장에 돈이 얼마나 풀릴지는 가늠할 수 없다. 금융회사가 담보로 제공할 수 있는 대상 증권의 발행 규모는 70조원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금융회사들이 입찰 과정에서 이를 담보로 어느 정도의 RP를 발행해 한은에 돈을 빌려달라고 할지는 유동성 여력을 살펴 그들이 판단할 몫이다.

금융회사들은 활용할 수 있는 돈이 늘어난 만큼 절박한 자금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보유자금이 턱없이 모자란다면 모르지만, 유동성이 충분한데도 일일이 절차를 따져가며 숨넘어가는 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의 속을 까맣게 태운다면 정말 무책임한 일이다.

당장 돈이 급한데 3∼4개월씩 대기하라면 대출 심사만 목 빠지게 기다리다 도산하는 기업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날 것이다. 금융회사는 대부분 국민이 맡긴 돈을 자산으로 서비스하는 특성상 국민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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