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편집부 기자

새로움을 행복이나 즐거움으로 밖에 알지 못하게 되어버린 너의 비극을 논하고자 한다.

우리 세대는 미디어의 과잉을 겪으며 조금, 아니 많이 어긋난 노선을 타게 됐다. 스마트폰이 주는 편리함에 주관이 사라지고 주체적 행동반경은 점점 좁아져 갔다. 나는 너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저 받기만, 소비만 하고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내주고 있을까.

우리는 타인과 마주 앉아 작은 화면에 코를 박고 나에게 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스마트시대의 부작용이 지성의 붕괴라고 말했다. 오로지 준비된 행복과 선택할 수 있는 즐거움만을 소비한 채 과도한 정보를 쌓는 공간. 현실의 시간을 축내고 스스로와의 고찰을 훼방 놓는 내면의 침체.

나는 그런 것들을 느끼며 두려움과 체념을 배웠다. 나는 네가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면 빈곤해지는 대화가, 사고하지 못하고 스스로 방향성을 구축하지 못하는 일들이 두려웠다. 그리곤 체념했다. 저 무궁무진 하고도 때로는 위로의 한 줄기가 되는 작은 화면 안에서 너를 구할 수 있을까. 누군가 가슴에 사무치는 말을 해준다고 한들 늘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즐거움만 주는 자극에서 네가 걸어 나올 수가 있을까.

그 세계에선 내가 원하는 것만 골라 먹으면 되기 때문에 선택의 실패는 없다. 시행착오의 시간 낭비와 번거로움도, 멀뚱멀뚱 천장만 보고 씹던 고독 따위도 없는 파라다이스가 있다. 하지만 그곳엔 나의 가능성이 별똥별처럼 떨어지는 미지의 세계도, 막막한 지평선 너머로 ‘지구는 둥글다’를 외치던 깨우침과 용기 또한 없다.

내가 말하고 듣고 만지고 겪어야만 깨우칠 수 있는 것들을 놓치며 우리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퇴보하고 있다. 너는 조금의 시간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잠시의 고난과 타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힐링이라는 자극을 위해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고충을 달랜다.

그 고충은 가끔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해소 된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보며 분노한다. 슬퍼하고 기뻐한다. 때로는 질타를 날리며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파악한다. 그리고 내가 되었어야 할 어떠한 사례들을 부러워한다. 결핍의 탄생이다.

감정을 감정으로 느끼고 말할 수가 없어 우리는 그런 식으로 고립 됐다. 그것은 현실의 경험과 개인의 사고를 빈곤하게 만들었다. 모든 행위들은 그저 모방되었고, 본질 따위는 묻어 두면 그만이었다. 황폐함을 느껴 돌아본 주변에는 무엇이 너를 반기고 있을까. 그리고 자아의 방향과 가치관의 기준 조차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너를 보며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내가 바라본 작은 시각에서 사회는 풍요에 고달프다. 만연하고도 풍족한 모든 것에 되려 외로워진 셈이다. 그렇게 증폭된 외로움이 우리를 각자의 섬에 가두게 됐다.

너는 이제 스마트폰의 부재가 지루하고 관계의 어둠이 두렵지만 그에 대해 깊이 고민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다.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못하고 거절되는 게 두려워 시도 조차 하지 않으며, 평가와 비합리적 낙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낼 수 없을 정도로 과잉 정보에 휩싸였으며 어쩌면 마음 한 귀퉁이에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필요 없다는 마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너는 네가 어디쯤 달리고 있을까 정도의 의식은 제쳐두고 무책임한 말만 쏟아낸다. 심지어는 무지하고 무책임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소리친다. 그리고는 무력감에 젖어 사회적 소외를 호소한다. 마음이 서리지 않을 수 없는 전개다.

우리 사회는 네가 말하길 바란다. 고개를 숙이고 엄지를 통한 왜곡이 아닌, 숙고하고 고찰하는 것에 대한 결과물. 내면의 소리를 방치하지 않고 주체성을 발견해 너라는 정체의 발전을 도울 수 있는 한마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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