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한국교수작가회 부회장
시위대와 진압대는 도심의 중앙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최루탄을 앞세운 진압대가 전진하면 시위 군중은 주변의 골목으로 흩어져 물 빠지듯 숨어들었다가 어느새 스크럼을 짜고 도로를 점령하였다. 밀물과 썰물처럼 치고 빠지고를 거듭했다. 시위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는 백 철모를 쓴 진압부대였다. 백골단이라 불렀다. 그들은 진압봉으로 붙잡힌 시위 대원을 무자비하게 타격했고, 닭장으로 불리는 호송차에 남녀 학생들을 마치 닭처럼,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다.
리반은 앞에서 세 번째 줄 스크럼에 들어 있다가 분무기처럼 쏘아대는 최루가스 세례를 받았다. 마스크를 잃어버려 가스를 흡입하지 않으려 숨을 멈추었고, 스크럼이 흐트러지자 백 철모들의 추격을 피해 재빨리 흰색 건물 뒤로 내달렸다. 빌딩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벗어나자 코너에 약국이 보여 재빨리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약국의 약사들도 눈을 비비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약사 한 분이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문 옆에는 심하게 재채기를 하며 눈물을 닦는 여자 시위 대원이 피신해 있었다. 그녀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리반은 그녀에게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건네며 재채기를 했다.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살아났다. 그녀가 먼저 리반을 불렀다.
“저기, 저기요!”
“박정란!”
“어머, 리반 씨 맞네!”
그들은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호루라기 소리에 쫓겨 약국을 뛰쳐나갔다. 진압부대의 포위망을 벗어나 다음 블록의 2층에 있는 다방으로 숨어들었다. 리반은 언제부터인지 정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들이 최루가스를 묻혀 들였는지 몇 안 되는 다방 손님들이 재채기를 해댔다. 이곳은 시위 현장과는 꽤 멀어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리반은 정란을 이끌어 좌석에 앉혔다.
“아니, 무슨 일이요?”
“왜요? 그런 리반 씨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뭔 일이래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동시에 재채기를 해댔고,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정란 씨가 이런 아수라장에 왜 끼어있냐 말이에요? 지금 직장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요.”
정란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그만두었어요. 그냥 농땡이 치는 학생이라고요.”
“학생? 그럼, 그땐 재수생이었어요?”
“재수는요! 그땐 용돈 필요해서 아르바이트 좀 하던 중이었죠.”
정란은 울다 지친 소녀처럼 눈자위가 벌게져 있었다. 아르바이트였다니, 맹랑한 말이었다. 그럼 그때도 학생이었단 말이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헤헤.”
말이 안 나왔다. 알 수 없는 여자라는 생각에 앞서 대견해 보였다. 정란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여린 여학생 신분으로 거대 권력에 당당히 맞선 당찬 모습이었다. 리반에게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데모하지 말라면서 면회 가기 싫다고 하던 정란이었다. 그녀도 리반을 보면서 미대생들이 데모하는 걸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런 정란에게 리반은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예술을 하는 학생들이 더 순수하지 않겠느냐고, 순수할수록 더 열정적일 수 있는데. 나라 돌아가는 꼴을 뻔히 보면서 가만있을 수 있느냐고 했다. 정란은 큰 눈을 크게 뜨고 리반의 말을 경청했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정란의 동그랗게 뜬 눈은 더욱 여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달리 보였다. 나쁘다고 보면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멋지다고 보면 멋진 것만 두드러져 보이는 각인이론이 그대로 증명되는 상황이었다. 무릇 선입견은 허점이 많아서 모르는 것만큼 오차는 확실하게 간격을 두고 있었다. 대양대학 불문과 학생이 박정란의 정체였고, 그건 박정란이라는 양파의 첫 번째로 벗겨진 양파껍질에 지나지 않았다.
여종업원이 엽차를 내려놓으면서 눈치를 살폈다. 시위대 학생들 같아 차 주문을 받아내기가 곤란한지 엉거주춤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커피와 토마토 주스를 시켰다. 정란의 가쁜 숨이 진정되자 리반이 비로소 피식 웃으면서 숨결을 다독였다.
“그땐 미안했어요.”
“언제요, 채영 땜에요?”
“그것도 그렇고. 나랑 만났을 때 혼자 아는 척 떠벌렸던 거요.”
정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대꾸가 쉬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래요?”
그녀답지 않았다. 하지만 저 조그만 입에서 어떤 엉뚱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때였다.
“시국이 엄중해서 할 이야기는 아닌 줄 알지만,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되나요?”
정란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은 이 말을 익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시국에 시작은 무슨! 그땐 왜 내 곁을 떠났는데요?”
“떠난 게 아니라, 그때는 채영의 아우라가 그대를 에워싸고 있었던 게 사실 아니었나요? 뭐 어쨌든 밀고 땡기고 밀당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드는 거 아닌가요?”
맹랑했다. 잠시 눈싸움이 탱탱했지만 리반이 이겨 낼 눈빛이 아니었다. 그래도 리반은 버텼다.
“미안하지만, 난 한 번 떨어지면 그만이야.”
“끝까지 시위네요. 그럼 되었어요. 없던 일로 합시다.”
잠시 뜸을 들이던 정란은 특유의 맹랑함으로 받아넘겼다. 그때 리반이 틈을 열었다.
“기회는 있어요.”
“리반 씨, 혹 그새 애인 만들었어요?”
설마 하는 표정의 확인 요청에 리반은 빙그레 웃었다.
“아직은 빈방.”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그 방 내가 똑똑, 노크합니다.”
“이 아가씨 당차기는! 내게도 여유가 필요해요.”
“일단 우리 애인하기로 약속하고 봐요. 기회는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만이지 항상 멈춰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정란은 뼛성 있는 억양으로 말 맺음을 하였다. 그녀는 전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올곧아 보이는 처신이 리반의 빈 가슴을 메워들었다. 정란의 존재는 채영과 같은 뿌리였다. 채영이 없는 자리에 정란이가 다가서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채영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정란은 특유의 영민함으로 리반이 보인 틈새를 공략하여 그가 딴 생각할 겨를이 없게 만들어갔다.
한편 그녀는 마치 양파 같았다. 벗길수록 새로운 면이 드러났다. 정란은 재야인사인 박두삼 선생의 외동딸이었다. 평소 선생의 인품과 정의감을 존경해오던 리반에게 정란의 벗겨진 면목은 특별했다. 박두삼 선생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출신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해 온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했던 상해 임시정부 출신이어서 해방 후에는 정치 전면에 나서지 못한 재야인사였다. 정란이 보따리를 풀 듯 쏟아낸 집안 내력은 이제까지 수럭수럭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게 했다.
6.10 항쟁은 6.29를 끌어내 민주화를 앞당겼으며 이듬해 박정란은 리반과 결혼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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