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 수필가

내 나이 10살 전후로 생각된다. 저녁 가족 시간 때면 할아버지는 가끔 구수한 옛날 예기를 들려주셨다. 일부는 일흔을 앞둔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떠 오른다. 어린 나이지만 소중한 교훈이 담긴 구수한 이야기였기에 각인된 것 같다.

그중 급난지붕(急難之朋) 즉, 급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씀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ㆍ ㆍㆍ 옛날에 한 부자가 있었다. 아들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하며 날만 새면 밖으로 나가 친구와 어울려 놀았다. 그때마다 친구들을 대접하느라 적잖은 돈을 낭비하곤 했다.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가 어느날 아들을 타일렀다. “얘야, 너도 이제 집안 돌 볼 생각을 하거라. 어째서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돌아다닌단 말이냐?” “아버지,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두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 친구에게 환영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버지.” “그건 그렇지, 하지만 친구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웃는 얼굴로 어울리는 친구는 많아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드문 법이니까. 혹시 네 친구들이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너에게 받는 것에 재미를 들여서 그러는 것은 아니냐?” “아버지는 제가 아직 어린애인 줄 아시는군요. 제 친구들은 모두 진실한 친구들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친구를 사귐에 참으로 성공했는지 아닌지를 이 아비가 시험해 보아도 되겠느냐?” “아이참, 아버지! 아버지는 평소에 친구가 많지 않으셔서 저희의 우정을 이해하실 수가 없으신 거예요. 하지만 좋습니다. 이 기회에 저희 친구들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 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약속한 아버지는 그날 밤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거적에 쌌다. 그리고 지게에 지게하고 맨 먼저 아들과 가장 친하다는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아들은 친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이보게 실은 내가 조금 전에 실수를 하여 사람을 죽였네. 그래서 여기 시체를 가지고 왔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좀 도와주게.” “뭐라고! 시체를 가지고 왔다고? 나는 그런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내 집에서 냉큼 사라지게.” 아들은 이렇게 가까운 친구의 집을 연달아 찾아가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모두 다 냉정하게 거절만 당했다.

“자, 이번에는 내 친구를 찾아가 보기로 하자.” 두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갔다. 사정을 이야기 하자 아버지의 친구는 두 사람을 집안으로 안내 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샐 것이네. 이 시체를 지금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저 나무 밑에 내려놓고, 자네는 내 옷으로 갈아입게나. 그리고 수습책을 함께 생각해 보세.” 아버지의 친구는 거적에 쌓인 것을 번쩍 둘러메고 자기 집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친구여! 미안하네. 그 거적에 쌓인 것은 시체가 아니라 돼지고기라네. 내가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네. 그려!” “뭐야? 에이 짓궂은 친구 같으니!” “자, 우리 돼지고기 안주해서 술이나 실컷 마시세!”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알았을 것이다. 친구가 많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요, 친구를 날마다 만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많으나 위급한 처지에 있을 때 도와주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라.

명심보감에 급난지붕(急難之朋)이라는 말이 있다. 급(急)하고 어려울(難) 때 힘이 되어주는 친구(朋)라는 뜻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상담할 수 있는 친구,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는 일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 마음이 아플 때 의지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힌두 속담에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라는 말이 있고, 공자는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향기가 진한 꽃 주위에 있으면 나에게도 향기가 나고, 악취가 나는 곳에 있으면 내 몸에서도 악취가 나는 법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한 사람이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친구다”라고 했다.

영국의 시인 월리엄 블레이크는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사람에겐 우정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다.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한 선택일 뿐이다. 삶을 멋지게 엮어가는 위대한 지혜는 우정(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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