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한국교수작가회 부회장

앳된 여자의 신음 같은 것이 들린다. 그 소리에 눈을 뜨니 어둠이 빛으로 바뀐다. 환청이 아니다. ‘여보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불러본다. ‘여보세요’라는 일상의 언어가 낯설다. 기대감에 귀를 바짝 기울인다. 그쪽에 누구 계시냐고 꺼져가는 소리가 난다. 어디, 어디인지 벽을 두드리라고 하니 뒤쪽 벽에서 약한 두드림이 전해진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말 상대가 생기니 기운이 난다. 그쪽에서는 다리가 시멘트 덩이에 눌려있어 빠져나올 수가 없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진 음성으로 변해가지만, 이곳으로 옮겨 온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다리를 빼주어야 할 텐데, 여긴 어딘가. 여자는 혹 알까?

- 건물이 무너졌어요?

- 무서워요. 사람이 많이 죽었을 거예요. 저는 최슬아입니다. 아저씨도 그곳에 갇혔지요?

그녀는 이 빌딩 입주회사 직원이라 한다. 화장실에 있는데 별안간 천장과 벽이 갈라지더니, 천둥소리가 나면서 몸이 곤두박질쳤다고. 이 건물은 토레스 몰이라고 한다. 토레스 몰이 무너졌다면 수많은 사람이 깔렸을 테고 바깥은 지금 아수라장일 것이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일들이 눈에 삼삼한데 그런 큰 사고가 또 일어나다니.

- 무서워요! 너무 아파요. 건물 붕괴 몇 시간 전, 건물이 폭파될 거라는 메시지를 받았어요. 다들 놀라서 쇼핑몰을 박차고 나갔지만 전 미처 피할 시간이 없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힘에 부친다. 건물 폭파 메시지를 미리 받았다고? 그렇다면 테러가 아닌가! 건물을 폭파하면서도 인명 피해는 최소화 한 테러?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아무튼,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아프다는 말에 나를 돌아본다. 오금이 펴지지 않고 사지가 굳어버려 내 것이 아닌 듯하다. 몸이 화끈거리고 엉덩이가 쑤신다. 이제까지는 아픔보다는 배만 몹시 고팠다.

- 콘크리트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그쪽으로 접근이 안 돼요. 이곳도 사정은 비슷하니 정신을 잃지 말고 그냥 견뎌내요. 구조대가 우릴 꼭 구해줄 테니 정신 줄을 똑바로 잡고 있어요.

그 뒤 한동안 그쪽에서는 기척이 없다.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이 들었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 아가씨…, 내 말 들어요? 잠이 오면 자 둬요. 깨어나면 구조가 되어 있을 거예요.

힘이 쭉 빠져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흙먼지 때문인지 목이 깔깔하다. 힘들어하는 저쪽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우지지직 -

공간을 지탱하는 벽들이 흔들리며 시멘트 부스러기들을 쏟아낸다. 구조물이 위로부터 내리누르는 중량을 견디기가 힘겹다는 비명이리라. 멀리서 환청처럼 돌 부대끼는 소리가 들린다.

- 안 돼! 더는….

몸을 모퉁이 쪽으로 웅크리면서 눈을 질끈 감는다. 공간은 더 좁아졌으나 흙먼지가 내렸을 뿐, 다행히 더는 조여오지 않는다. 두려움에 익숙해지려는데 또 다른 절망에 맞닥뜨린다. 어둠이 덮쳤다! 깜깜한 속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벽도, 시멘트 바닥도, 삼각 꼴의 공간도 없다. 전등이 꺼졌다. 어질어질 현기증이 인다. 가늠할 수 없는 칠흑에 몸이 붕 뜬다. 하지만 어둠이 오니 두려움은 오히려 가시고 있다. 좁은 곳인지 넓은 곳인지, 눈을 감으니 공간감은 더욱더 팽창한다. 그리고 망막에 많은 것들이 떠다닌다. 바깥세상의 건물들, 구조대와 구급차, 취재진, 부상자들. 주검도 보인다. 흰 광목을 덮은 들것, 벽 저쪽의 여자가 들것에 실려 나가고, 그다음에는 내가 주검이 되어 따라 나가고 있다. 나는 그렇게 끝나는가.

- 아저씨, 물…….

환청인 듯 들리는 목소리. 나는 아직 주검이 아니다. 그녀가 나를 구해준 것 같다. 처음 대하는, 여자의 얼굴이 슬며시 나타나는데 표정은 모르겠다. 어둠이란 그지없이 묘하다. 전등이 밝았을 땐 몰랐던 처녀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오히려 보인다니. 그녀는 흙 얼룩이 졌으나 눈이 초롱초롱하다.

빛이 있어 사물을 볼 수 있으나 그 빛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철저히 감춰지고 있는 건 아닌지. 빛이야말로 시야를 한정시키는 또 하나의 벽이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는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은데 말이다. 암흑의 시대에 빛의 등장은 절대자의 존재 자체였다. 그 뒤로 빛이 닿는 곳마다 사물이 존재를 드러내었다. 세상이 빛의 세상과 암흑의 세상으로 갈라졌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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