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한국교수작가회 부회장

그 뒤로도 레지 누나의 말 한마디를 자주 되새김질했고, 나는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이 말이 나중에는 자기 암시가 되고 행동이 되었다. 특별해지려면 다른 아이들과 달라야 하고, 책을 다시 잡고, 검정고시 준비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유경을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했다. 공부만이 유경을 당당하게 만날 수 있는 길이었다.

레지 누나의 ‘특별한 아이’는 그녀가 내게 준 소망의 씨앗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귀밑머리가 희끗희끗 해졌어도 어릴 적 가슴에 새겨진 레지 누나의 말을 놓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때 보았던 고마운 레지의 얼굴은 아쉽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와 눈매가 닮은 유경의 얼굴로 환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에 있는 동상의 흉터를 보면 유경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아버지가 집 지어 이사 나오고, 유경이 중학교에, 나는 신문팔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둘은 떨어져 사는 거리만큼 멀어졌다. 두 개의 나뭇가지가 각기 다른 태양을 바라보게 된 것처럼. 살갑게 지내던 유경이 곁에 없으니 허전했으나 유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경은 내 맘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따금 길가에서 마주치면 나는 얼굴부터 화끈거렸는데 유경은 그냥 웃고 지나갔다. 그때부터 진학 못 한 속앓이를 시작했다.

저녁 신문을 판 다음 야학夜學에 갔다. 대학생들이 중학교 진학을 못 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야학 텐트였다. 형들은 씩씩하고 밝았다. 대학생 형들을 따라 교회에 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도 밝아졌다. 피곤하지만 잠을 줄이고 공부하면서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기도했다. 그 결과 나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원하던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니, 레지 누나의 ‘특별한 아이’는 내게 걸어 준 마법의 주문이었다.

유경은 언제나 내 주변에 머물면서도 잡히지 않았고 애만 태우던 존재였다. 그 무렵 아버지 사업이 나아졌고 혼자 힘으로 검정 고시를 합격하여 고등학교에 다니는 나에게 아버지는 대학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대신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에 들어가라고 했다. 고등학생들의 로망roman인 국립대학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내 공부를 믿고 대학 입시를 치렀지만 떨어졌다. 다시 도전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특별한 아이였기에 그랬다.

“재수하고 있구나!”

그날도 학원 다녀오던 철길 건널목에서 마주쳤다. 마치 누나 같은 유경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겨우 말을 받았다.

“남들 못 하는 경험이라 생각해.”

“열심히 해!”

이 한마디뿐, 데면데면한 유경은 횅하니 뒷모습만 보이며 멀어져 갔다.

유경이 일류 대학교 남학생과 사귄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때부터는 유경의 눈빛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으며 그 냉기가 나를 단련시켰다. 비워진 유경 자리에 대학 합격의 소망을 채워 넣기로 작정했다. 반드시 합격하여 서유경 앞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재수再修 끝에 대학에 들어갔고 왼쪽 가슴에 소망한 국립대학의 배지를 달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그룹에 들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전히 유경에게만 쏠렸으나 만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유경은 재벌 회사에 취직하여 비서실에 근무한다고 들었다. 유경을 생각해 미팅도 안 나가던 그때, 동네 로터리 근처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감색 투피스의 유경이 조금은 낯설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유경이 앞에서 당당했다. 차 한잔하자. 누가 꺼낸 말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바로 옆 2층 다방으로 올랐다. 그토록 기다리던 서유경과의 독대 자리였다. 속은 진정되지 않았고 계단을 오르는 나의 장딴지에는 힘이 실렸다. 사회인이 된 유경은 세련된 요조숙녀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았다.

유경이 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나의 자존감을 부추겼던 것 같다. 사회인이 된 유경의 눈매는 더 고왔다. 이 눈이 다른 남자를 바라본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은 눈이었다. 막상 말 실마리를 잡지 못하면서 유경이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 방해될까 봐 멀리한 거야. 합격을 축하한다고 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이제부터 넌 내 거야! 난 유경을 사랑해. 앞으론 나만 만나야 해, 알았지?’라고 말하려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말로 꺼내지 못했을까? 나는 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유경이라고 고백하지 못하였을까? 그리고 숱한 세월을 후회로 보내야 했을까! 그날 다방에서 유경은 이런 말을 꺼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은 결정적인 말이었지만, 아주 하찮은 한마디였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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