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 명예교수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의 워번(Woburn)은 지난 19세기 산업화가 처음 시작되었던 곳 중 하나다. 이곳에서는 초창기에 피혁 산업이 크게 번창하여 많은 공장들이 들어섰다. 피혁 산업의 발전은 다른 산업으로 파급되어 후에 이곳에는 각종 화학 공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피혁 산업은 움츠러들기 시작하여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대신에 대기업의 화학 공장들이 들어와 기존 산업을 대체하게 됐다.

1972년 이곳에 사는 3살짜리 아이 지미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지미의 어머니 앤 앤더슨(Anne Anderson)은 자신의 아들이 오염된 식수로 인해 병에 걸린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백혈병은 어린이 10만 명 중 4명이 걸릴까 말까 한 희귀한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번에는 유난히 백혈병 환자가 많았다. 그래서 앤은 이곳에서 사용하는 지하수가 분명히 백혈병과 관련이 있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다녔으나, 주위 사람들은 그녀를 까다롭고 유별난 엄마 정도로만 여겼다.

지미가 백혈병 진단을 받기 오래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식수에 대한 불만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이곳을 흐르는 애버조나강은 150년이 넘도록 각종 오염물질이 둥둥 떠다녔고 식수로 사용하는 지하수도 이상한 맛과 냄새로 자주 문제가 됐다. 특히 1964년과 1967년에 각각 만들어진 두 개의 우물을 가동한 이후부터는 물맛이 확연히 나빠졌다. 이 두 우물의 안전성은 계속 논란이 됐으며, 폐쇄와 가동을 반복했다. 주민들의 반대로 우물이 폐쇄되었다가도 가뭄이 닥치거나 물 수요가 늘어나면 하는 수 없이 다시 가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79년 봄, 워번 경찰서가 북부 지역의 공터에서 184개나 되는 산업 폐기물 드럼통이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건 현장은 두 개의 우물에서 불과 500m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이에 두 우물의 수질을 조사해보니 공업용 용매제인 트라이클로로에틸렌(TCE: Trichloroethylene)으로 심하게 오염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역학조사를 한 결과 1964년부터 28건의 백혈병이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이 수치는 마을의 규모를 고려해볼 때 다른 지역보다 7배나 높은 것이었다. 게다가 환자들 대부분이 문제가 된 우물 가까이에 살았으며, 모두 오염된 우물물을 식수로 마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관계 당국은 TCE와 퍼클로로에틸렌(PCE) 등으로 오염된 우물을 영구히 폐쇄해버렸다.

1981년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며칠 뒤에 지미는 결국 1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아이의 어머니는 같은 마을의 일곱 가구와 함께 식수를 오염시킨 당사자로 여겨지는 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피소된 기업인 유니퍼스트(UniFirst), 베아트리스 식품(Beatrice Foods), 그레이스앤컴퍼니(Grace & Company)는 TCE를 비롯한 각종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공장을 이곳에서 오랜 기간 가동해왔다. 이들 기업 중 유니퍼스트는 소송이 시작되기 전에 합의금으로 약 100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빠져나갔고, 나머지 두 회사는 우물 오염에 대한 책임 여부와 오염물질이 백혈병을 일으킨 것인가에 대한 진실게임을 계속해야 했다.

소송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교수 두 명이 3년간 워번에서 발생한 백혈병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들은 이곳의 두 우물이 각종 유해물질로 오염되었고 그 우물물이 백혈병과 관련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대해 피고 측은 여러 교수와 의사들을 동원해 TCE는 백혈병과 무관하며, 발암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라는 반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원고 측을 지원하는 학자들은 적은 양의 TCE라도 장기간 노출될 경우 면역 체계에 이상이 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주민들의 혈액 검사를 실시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를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워번 주민들의 혈액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되었으며, 워번의 우물에서 검출된 TCE가 면역기능 장애 및 백혈병 등 중병의 원인이 된 것이라는 의견서가 재판정에 제출되었다.

다음 차례는 누가 지하수를 오염시켰으며, 그것은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고 또 얼마나 오염시켰는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원고 측 변호사는 피소된 회사의 직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조사해 나갔고 이 회사들이 TCE를 포함한 유해화학 폐기물들을 공터 웅덩이 등에 무단으로 폐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여기에 버려진 것들이 애버조나강까지 흘러가 강변의 늪지대를 유독성 물질로 오염시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이들 회사가 버린 TCE가 백혈병을 일으켰다는 직접적인 결론은 내릴 수 없더라도 오염된 식수가 백혈병을 악화시켰다는 것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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