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in 연극]대학살의 신(Le Dieu du carnage)

김정희 연극인

2026-03-31     영남경제
*희곡읽기 -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 프랑스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인 아들이 친구들과 공원에서 놀다가 들어왔는데 얼굴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다. 급히 아이 아빠에게 연락하고 병원으로 뛰어간다. 살짝 입술과 잇몸이 찢어졌지만 다행히 큰 외상은 없고, 치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듣는다. 치과 의사는 앞니 신경이 부분적으로 노출이 되었지만 아직은 성장기이니 덮어씌워서 보존을 하고 성장이 다 끝났을 때 보철치료를 해야할 것이라고 한다. 찢어진 잇몸을 꿰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진통제도 먹였고 차가운 죽도 먹였다.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아 다시 물어본다. 나무 막대기로 맞았다는 말만 할 뿐 친구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남편은 침묵이 그 아이를 돕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을 때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앞으로도 그래도 되는 줄 알거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들은 친구들과 있다가 말다툼을 하고 집으로 오려는데 그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돌아봤더니 바로 나무막대기로 후려쳤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고, 프랑스 희곡 ‘대학살의 신’(야스미나 레자 작)의 발단이 되는 사건을 풀어서 써 본 것이다.

당신은 교양이 풍부하고 평소 인간에 대한 배려와 예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다. 앞에 묘사한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 당신에게 닥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가 왜 그랬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하지 않을까?

먼저, 사진을 찍어 아이의 상태를 증거로 남기겠지. 다음으로는 병원에 가서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치료를 받아야지. 그리고 의사의 진단서를 끊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매사 똑부러지게 일처리 잘하는 당신이니까. 다음으로는 학교에 연락해서 담임선생님과 사건 처리에 관해 상담을 하겠지. 아! 아이들을 분리해줄 것을 요구하고. 가해한 학생 부모와 연락을 취한 후 학교폭력위원회를 소집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가해 부모와 연락이 닿는 순간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많은 경우의 수가 생긴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 전학이나 소송으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름다운 화해를 통해 아이들에게 값진 배움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만큼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학살의 신’ 등장인물들은 조금 다르게 문제를 풀어가려고 한다. 이가 나간 피해자 브뤼노의 부모인 베로니크와 미셀은 중산층 지식인답게 아이들 싸움은 ‘대화로 풀’어야 한다며 가해자 페르디낭의 부모 알랭과 아네뜨를 집으로 초대한다. 튤립을 사다가 꽂아놓고 차와 직접 만든 클라푸티를 대접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베로니끄가 쓴 진술서에서 ‘무장하고’라는 단어에 알렝은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분위기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이어 아네뜨는 미셀이 키우던 햄스터를 길에 버리고 온 것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알랭은 업무 전화를 자꾸 받으면서 집중하지 못한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아네뜨는 결국 견디다 못해 거실에서 구토를 하게 된다. 베로니끄는 아끼는 책이 망가져 불평을 하고 알랭의 자신의 옷과 서류만 걱정한다. 미셀은 그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를 쓴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서로에게 냉소와 비난, 조롱을 하게 되고 차에 이어 술까지 나눠마신 그들은 마침내는 ‘남자 대 여자’, ‘개인 대 개인’으로 구도를 바꿔가며 폭발적인 분노를 쏟아내게 된다.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고 서로를 긁어대던 그들은 소파에 널브러진다.

이 작품은 교양과 지식을 갖추었다 믿는 중산층의 가식과 위선이 유리거울처럼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이다. 제목 ‘대학살의 신’은 그리스비극처럼 거창하고 비극적으로 들리지만 실제 무대는 한 가정의 거실에 불과하고 사건 또한 어른들의 유치한 말싸움이 끝이다.

이런 부조화는 중산층이 고수하고 싶어하는 교양이 얼마나 얇고 깨지기 쉬운 껍데기에 불과한지를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늘 배운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어하는 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대학살의 신’ 또한 만나게 해 준다. 갱년기 여성이 사춘기 자녀들과 아직 ‘계몽’되지 못한 남편과 함께 복작이다보면, 사소한 순간에도 깨어나 불을 뿜는 ‘대학살의 신’ 말이다.

이 놀라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조디 포스터와 케이트 윈슬렛, 크리스토프 왈츠, 존C. 레일 리가 두쌍의 부부로 출연한다. 완벽한 대본과 놀라운 연기력만으로도 벌써 꽉찬 작품이지만,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다. 아쉽게도 현재 OTT에서 볼 수 없다. DVD 구매나 대여는 가능하다. 하지만 출판된 희곡으로 먼저 만나보시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