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동해가스전 BP 우선협상 ‘제동’… 영일만 대왕고래 꿈 또 멀어지나
산업부 “사업 추진 여부 재검토”…석유공사 내부 결정 효력 사실상 부인…업계 “정치 리스크로 해외 신뢰도 추락 우려…中·日 자원경쟁만 이득”
정부가 영국 석유메이저 BP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한국석유공사의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 계획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한때 ‘영일만 대왕고래’로 상징되던 가스전 부활의 꿈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26일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입찰 참여자와의 협의 결과를 종합 검토해 사업 추진 여부를 포함한 향후 방향을 논의하겠다”며 “들어오려는 기업이 얼마를 투자하고 어떤 계획을 제시하는지를 종합적으로 따져보겠다”고 밝혔다.
‘사업 추진 여부’까지 언급한 것은, 석유공사가 추진 중인 해외 자본 유치를 통한 심해 가스전 개발 자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의 강경 입장은 김정관 산업부 장관이 석유공사의 내부 결정을 사실상 부인한 데서 비롯됐다. 김 장관은 지난 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BP가 이미 우선협상자로 정해졌느냐”는 질의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언론 보도로 먼저 알려진 과정이 매우 부적절했다”며 “도대체 산업부를 어떻게 보기에 피감기관이 독자적으로 이런 결정을 하느냐고 간부들에게 엄중히 말했다”고 밝혔다.
석유공사는 이달 중순 사내 평가위원회를 열어 BP를 동해 심해 가스전 공동개발 우선협상대상자로 내부 선정했다. 하지만 정부가 “최종 효력이 없다”고 못박으면서, 협상은 사실상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석유공사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2차 탐사시추 이후 해외 오일메이저와의 공동개발을 추진해왔다.
BP, 엑손모빌 등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참여한 국제 입찰에서, 석유공사는 최대 49% 지분 투자 유치를 목표로 했다.
자체 재원 부담을 줄이고, 심해 개발 경험이 풍부한 파트너를 끌어들여 사업의 실효성을 높이려는 전략이었다.
BP의 참여 의사 표명으로, 지난해 ‘대왕고래 유망구조’ 1차 탐사 불발 이후 동력을 잃었던 사업에 다시 활기가 돌 것으로 기대됐지만, 정부의 제동으로 계획은 급제동이 걸렸다.
산업부는 최근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여당의 요구를 수용해 ‘액트지오 선정 논란’에 대한 공익감사 청구를 이미 진행한 상태다. 감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업 추진 결정을 미루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사실상 ‘장기 보류’ 가능성이 커졌다.
관련 업계는 정부 개입의 시점과 방식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한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입찰 막바지에 정치적 이유로 협상 절차를 멈추면, 해외 투자자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시간이 길어질수록 BP 등 참여 기업이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는 “사업이 취소되지 않더라도 장기간 ‘보류’되는 순간, 한국 공기업의 해외 신뢰도는 타격을 입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안은 정부의 ‘정책 통제권 강화’와 석유공사의 ‘자율경영권’ 간 충돌이라는 구조적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한 전직 공기업 임원은 “정부가 감사나 정치적 논란을 이유로 사업 추진 단계마다 개입하면, 공기업은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구조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은 동북아 해역에서 석유·가스 탐사 및 심해 시추 프로젝트를 잇따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가스전 탐사 불발 이후 2년 넘게 사실상 ‘공백기’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정부의 제동이 자원주권 경쟁에서 한국만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 다른 업계 전문가는 “정치 논란으로 국제 입찰을 중단하는 나라는 드물다”며 “이번 건으로 해외 파트너들이 ‘한국은 정부 리스크가 크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해 심해 가스전은 상징적 의미가 큰 만큼, 정부가 감사와 사업 추진을 병행할 유연성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산업부는 감사원 감사 진행과 병행해 외자 유치 타당성을 다시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해 가스전 사업의 ‘잠정 중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대왕고래’로 불린 한국 최초 심해가스전의 부활을 기대했던 지역사회와 산업계의 희망이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