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업계, 전기차 ‘캐즘’ 돌파 위해 PRS 발행 러시

에코프로·LG화학·SK이노, 수조원대 자금 확보 총력

2025-09-26     강신윤 기자
전기차 시장이 일시적 수요 정체, 이른바 ‘캐즘(Chasm)’ 국면에 접어들면서 배터리 업계가 새로운 자금 조달 수단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에코프로,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주가수익스와프(PRS, Prepaid Repaid Security) 발행에 나서며 수조원대 유동성 확보에 나서는 모습이다.

업계에서는 PRS가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회계 처리돼 재무 안정성을 높이면서도 지분 대량 매각에 따른 주가 불안 우려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안으로 부상했다고 분석한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에코프로는 최근 자회사 에코프로비엠 주식 674만 주를 기초로 PRS 계약을 체결하고 약 8천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당초 7천억원 규모를 목표로 했으나 증권사들의 적극적인 요청과 투자 수요가 몰리면서 1천억원을 증액했다. LG화학도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기반으로 2~3조원 규모의 PRS 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SK이노베이션은 지난 7월 자회사 SK온과 SK아이이테크놀로지 증자 과정에서 각각 2조원, 3천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PRS 계약을 체결했다. SK온은 배터리 제조,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분리막 사업을 맡고 있다.

PRS는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지만, 재무제표에는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반영되는 구조다. 이 때문에 부채비율 악화 우려 없이 대규모 자금을 손에 쥘 수 있다.

특히 전기차 캐즘으로 매출과 이익이 둔화되는 상황에서 재무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업계가 선호하는 이유로 꼽힌다.

더불어 시장에 직접 지분을 내놓을 경우 발생하는 주가 급락, 성장성에 대한 의구심 등 부정적 신호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PRS는 미래 주가 상승 가능성에 베팅하는 성격이 강하다.

발행 기업에 대한 장기 성장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투자자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공모 과정에서 흥행할 경우 기업 이미지 개선 효과까지 기대된다.

실제로 에코프로가 조달 목표액을 증액할 수 있었던 것도 기관투자자들의 적극적 참여 덕분이었다.

그러나 업계 일각에서는 PRS 발행이 늘어나는 현상이 곧 배터리 산업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고금리와 원자재 가격 불안, 글로벌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 등으로 배터리 제조사들의 적자가 누적되고 투자 여력이 축소된 가운데, 기업들이 기존의 차입금 조달 대신 자본 성격의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그만큼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특히 에코프로와 LG화학 같은 선도 기업뿐 아니라 2차·3차 협력사까지 유동성 확보 압박이 번질 경우, 업계 전반적으로 PRS 발행 러시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단기적으로는 자금 조달 효과가 긍정적일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투자자들이 “기업의 성장이 아니라 재무안정 관리 차원에서 주식 기반 자금을 동원한다”는 인식을 가질 경우 성장성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이라는 변곡점에서 배터리 기업들은 성장 투자와 재무 안정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PRS 발행은 현 시점에서는 합리적 대안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본업 경쟁력 강화와 시장 다변화를 통해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