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이강덕 포항시장, 백악관 앞에서 울린 절박한 외침…“철강이 무너지면 포항이, 그리고 한국이 무너진다”
“철강산업은 포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경제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9월 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앞. 이강덕 포항시장의 목소리는 잔디광장을 스쳐가는 바람만큼이나 날카롭고 간절했다.
손에는 ‘Stop the 50% Tariff!’라고 적힌 피켓을 든 포항시 관계자들과 현지 한인들이 둘러선 가운데, 그는 준비해온 연설문을 꺼내 들지 않았다. 대신 두 손으로 마이크를 단단히 움켜쥔 채, 즉흥적으로 포항의 현실을 쏟아냈다.
“50% 관세는 동맹에 대한 배신이자 지역 생존에 대한 위협입니다. 지금 포항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순간 지나던 행인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백악관 앞은 늘 시위와 집회가 열리는 곳이지만, 이날의 외침은 남달랐다.
한국 철강산업, 그중에서도 포항이라는 지역이 한 도시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경제와 안보의 문제로 직결된다는 점에서였다.
◇백악관 앞 긴장된 공기, 교포사회와 하나 된 외침
버지니아한인회 김덕만 회장은 마이크를 이어받아 이렇게 말했다.
“포항은 한국 철강산업의 심장입니다. 포항이 흔들리면 대한민국 산업 생태계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우리 한인사회도 포항과 함께하겠습니다.”
현수막을 붙이고 있던 한 교포는 기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살지만, 고향의 산업이 무너지면 우리 정체성도 흔들립니다. 철강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민족의 산업 뿌리입니다.”
워싱턴의 초가을 바람 속, 백악관 앞 잔디광장은 낯설지만 절박한 목소리로 채워졌다. 미국 시민들의 반응도 엇갈렸다.
인근 대학생 사라는 “동맹국에 50% 관세라니 충격적”이라며 피켓을 들었고, 현지 직장인 로버트는 “무역은 복잡한 문제지만, 동맹의 신뢰가 무너지는 건 위험하다”고 말했다.
◇국제무대에서 던진 절박한 메시지
이 시장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기자들과의 즉석 질의응답에서 그는 포항의 구체적 상황을 설명했다.
“벌써 몇몇 제강 공장이 가동을 줄였고, 협력업체들은 매출이 절반 가까이 줄었습니다. 고용 축소는 지역의 청년을 내몰고 있고, 인구는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지역 소멸 위기까지 겹칠 수 있습니다.”
그는 “최소한 영국처럼 25% 수준으로 조정하거나 제한적 쿼터 예외라도 필요하다”며 미국 정부에 실질적 조치를 요구했다.
이어 “한·미 정상회담에서 철강 문제가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한국 정부의 소극적 태도에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KOTRA와 DGA Group 방문…문 두드린 시장
백악관 앞 캠페인을 마친 이 시장은 곧장 워싱턴 시내 코트라 북미지역본부로 이동했다. 회의실에서 만난 이금하 본부장은 시장의 손에서 직접 건의서를 받아들었다.
“포항 철강기업들이 과도한 장벽에 막혀 있습니다. 코트라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길을 열어주십시오.”
이 본부장은 “코트라는 이미 미국 정부·의회와 긴밀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포항시와 전략적으로 협력해 나가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튿날 방문한 글로벌 정책자문사 DGA Group은 한·미 통상정책의 핵심 네트워크를 가진 곳이다. 저스틴 맥카시 파트너는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포항은 한국 철강산업의 상징입니다. 동맹국의 산업 기반이 무너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인맥을 활용해 미국 의회를 설득하겠습니다.”
패트릭 케이시 파트너도 덧붙였다. “미국은 철강과 조선 부문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진 한국기업과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항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미국과 한국의 경제 동반자 관계를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런던–킹스크로스 현장에서 찾은 해법
워싱턴을 떠난 이강덕 시장의 다음 행선지는 런던이었다. 그는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 런던지회와 MOU를 맺고, 청년 인재 교류와 기업 네트워크 확대에 합의했다.
런던시청 도시재생 부서를 찾은 뒤, 킹스크로스(King’s Cross) 역 일대를 걸으며 이 시장의 눈빛은 더욱 진지해졌다.
과거 수십 년간 방치됐던 철도 유휴부지가 지금은 카페와 아트숍, 사무실로 되살아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는 안내를 맡은 김정후 런던시티대학 교수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포항 철길숲이 킹스크로스처럼 문화와 산업을 품은 공간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현장에 함께한 한 런던 시민은 기자에게 “재개발로 지역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며 “문화와 산업을 동시에 살리는 전략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귀띔했다.
◇베를린–분권형 지방자치와 MICE 산업의 가능성
베를린에서는 독일 도시협의회와 연방상원을 방문해 지방분권의 실체를 확인했다. 회의실에서 만난 한 독일 의원은 “연방제 국가에서 도시 차원의 정책 결정과 재정 운영은 일상”이라며 포항의 고민을 이해했다.
이 시장은 “포항도 철강에만 의존하지 않고, 청년 일자리·디지털 산업·도시재생을 위한 자율적 역량이 필요하다”며 독일식 분권형 도시 운영 모델을 벤치마킹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세계 최대 가전·디지털 전시회 IFA 전시장. 인파로 붐비는 현장에서 그는 포항 스타트업 ‘디자인 노블’ 부스를 찾아 젊은 기업인들과 악수했다.
“여러분이 포항의 미래입니다. 세계 무대에서 당당히 경쟁해 주십시오.”
IFA 주최 측 임원과의 간담회에서는 포항 기업의 참여 확대를 요청했고, 현장에서는 AI·IoT·스마트홈 등 최신 흐름을 꼼꼼히 살폈다. “이 기술들을 포항의 디지털 전환 전략에 반영하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포항 철강산업, 국가경제의 뿌리
포항 철강산업은 국내 조강 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며, 자동차·조선·건설 등 전방 산업의 핵심 자원이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과잉, 미·중 통상 갈등,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국제 환경 변화가 겹치며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포항의 한 중소 철강업체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매출이 40% 가까이 줄었고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정부의 단기 지원도 필요하지만, 결국 국제 통상 환경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다 같이 무너질 수 있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포항의 위기는 지역 차원을 넘어 한국 제조업 신뢰 전반을 흔들 수 있다”며 “관세 완화, 산업 다변화, 디지털 전환 전략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절박한 외교전,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
귀국 후 브리핑에서 이강덕 시장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철강산업을 지키는 일은 곧 포항을 살리고, 대한민국 경제를 지키는 일입니다. 이번 순방이 국제사회의 호혜적 무역환경 조성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길 바랍니다.”
백악관 앞에서 울려 퍼졌던 그날의 목소리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었다. “철강이 무너지면 포항이, 그리고 한국이 무너진다”는 절박한 생존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