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유래 성씨 이야기(7)]고집스런 ‘충절’ 지킨 경주 최씨,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남아
경주 최부자, 300년간 12대에 걸쳐 조선 최고 부자로 명성 쌓아...사방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했던, “온 나라가 존경했던 ‘진정한 부자’”
한반도 최초 통일 국가를 세운 신라의 천년 도읍인 경주는 신라 왕들로부터 유래된 박(朴)씨, 석(昔)씨, 김(金)씨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은 물론이고,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을 가지게 된 6촌의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까지 많은 성씨의 득성조가 있어 우리나라 씨족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가진다.
본지는 연속 기획으로 경주에서 유래한 성씨, 특히 6촌 촌장들로부터 유래한 성씨들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역사를 조명하고, 그 후손과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고려 말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최후까지 맞서 저항했던 최영 장군은 충절의 상징이자 ‘최씨 고집’의 유래가 되고 있다.
최영 장군의 가문인 동주 최씨는 이른바 ‘신라계 최씨’ 중 하나로 경주 최씨와 그 뿌리(소벌도리)를 함께하고 있다.
최씨들의 이 같은 고집은 국난의 시기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굽히지 않은 신념 몸소 행하며 가문의 명예를 더욱 빛내왔다.
경주 최씨의 대대로 이어져 오는 고집스런 청렴과 나라에 대한 충절은 ‘조선 최고의 부자’로 일컬어지던 ‘경주 최부자’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 ‘최진립’, 경주 최부자집의 시작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나라와 민족을 대하는 충절과 애민정신은 타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
최진립이 25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그해 4월 부산포에 상륙한 가토 기요마사의 2만여 왜군이 경주를 향해 올라오자 글공부만 하던 최진립은 주저하지 않고 부윤 윤임함을 찾아가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겠다고 했다.
왜군에 의해 경주성이 함락당하자 최진립은 부윤을 찾아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주둔하던 왜적을 마을의 장정들과 공격하겠다고 자청했다.
최진립이 살던 경주군 내남면 이조리는 울주 방면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왜군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최진립은 마을의 장정들과 이조리에 주둔하던 왜군을 몰살하는데 성공하고, 수일 후 언양에서 침입하는 왜병을 격파했으며, 이후 영천성 복성전에서 왜병을 무찌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최진립이 27세가 되던 1594년 봄에 무과에 합격해 오위도총부부장(종6품)에 임명됐으나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3년 후인 1597년에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정유재란) 최진립은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해 서생포에서 왜군을 격멸했다. 이어 권율과 함께 도산에서 대승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들어 또 다시 출진했으나 용인 험천에서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쌓아 받은 포상으로 부를 쌓았지만 재산은 아들 최동량에게 모두 물려주고 자신은 청빈하게 살았으며, 사후 청백리에 녹선되됐다.
◇파격적인 소작료율, ‘나눔의 선순환’으로 불러온 부
최진립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최동량은 큰 땅을 구입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 때 아들 최국선은 둑을 세우고 옆에서 도우며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최동량은 거름을 쓰는 시비법과 모내기를 하는 이양법으로 농사를 지어 수확량을 크게 증대시켜 부를 쌓기 시작했다.
최부자 가문이 진정 ‘부자’로 불릴 만큼 재산을 늘리게 된 것은 최동량의 아들 최국선(1631~1681) 때 부터다.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는데, 소작인들은 12월이 되면 양식이 없어 장리(양식을 빌려 두 배로 갚는 고리채)를 썼다.
이 때 최국선의 집에 화적이 쳐들어왔는데, 이들은 양식은 안가져가고 장리의 증표인 채권서류만 가져갔다.
이 일을 격은 최국선은 화적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남은 채권 문서도 다 돌려주도록 지시했고, 이후의 소작료도 5할만 받도록 했다.
이로부터 약 300년이 지난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이 ‘소작료를 5할로 낮춰달라’는 것이었으니 당시 최국선의 결정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이후 경주 일대에서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농들은 경쟁하듯이 달려와 최부자집에 알렸다. 소작농들은 최부자가 땅을 많이 가질수록 자신들이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최부자집은 지역의 논을 대거 사들이며 자연스레 만석꾼이 됐다.
최근 사회적 경제 또는 지속가능 성장 분야에서는 사회적 나눔이 오히려 부를 불러온다는 선순환의 사례로 이 사건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
‘만석꾼 최부자’의 부는 시대를 앞서간 매우 진보적인 동시에, 이기적 자본의 독점이 아닌 지역이 경제 공동체로서 함께 실현한 부라는 점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후 경주 최부자집은 경주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력 가문이 되어간다.
특히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등 최씨 집안의 육훈은 정경유착을 멀리하면서도 서당을 짓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농업과 잠업 등 실용에 집중하는 가풍을 만들어왔다.
◇나눔으로 쌓은 부, 독립운동의 자금줄 되다
부를 쌓되 지역을 넘어 나라를 이롭게하는 ‘선한 영향력’을 강조해온 경주 최부자집은 근대로 오면서도 그 가풍을 이어 왔다.
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최부자집이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왔으나 지난 2018년 7월 경주 최부자 고택에서 그 증거가 되는 문서들이 대거 발견되면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당시 발견된 문서 중에는 당시 최부자집 전재산이라 할 만한 66만평 전답을 담보로 일본 식산은행에서 35만원(현재 약 200억원 가치)을 대출받은 1922년 2월 14일자 근저당설정계약서가 발견됐다.
이 근저당 설정 계약서 상의 채무자는 최준이 운영했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이 회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 운영자금의 6할을 감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외에도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실천에 옮겨왔던 기록들도 발견됐는데, 1600년대부터 어려운 사람에게 곡식을 지급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가 그것이다.
최부자집은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넘어 구한말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됐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해방 후 조국의 인재 양성에 전 재산을 내놓다
해방 후 최준은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길이 남기는 길이라며, 전재산을 기부해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최준은 지역 유지들과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했고, 대구대학을 설립했다. 최부자집의 고택과 논, 선산까지 모두 대구대학에 기부했다.
1952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서 피난 온 교수들이 교편을 잡으면서 계림학숙을 만들기도 했다. 이 계림학숙은 이후 대구대로 편입됐다.
이후 대구대는 1964년 이병철 삼성그룹 대표에게 한푼도 받지 않고 무상으로 넘겨줬다. 이 결정에 대해 당시 최준은 “예전에 손병희(당시 천도교 교주)가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을 맡아달라 부탁했을 때에도 아무 대가없이 했다”고 말했다. 실제 손병희는 훗날 최준이 추천한 인촌 김성수에게 보성전문을 무상으로 맡겼다.
하지만 대구대학은 1966년 이병철은 대구대학의 운영권을 박정희 정권에 넘겨줬고, 이후 청구대학과 합병해 1967년 12월 지금의 영남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