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파란 눈의 성직자,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남대영 신부를 찾아서
2023년은 남대영 신부(1895~1972, 루이 델랑드 Louis Deslandes)의 대한민국 입국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남대영 신부는 프랑스인으로서 삶의 많은 시간을 한국, 그 중에서도 경북과 포항에서 활동하며 불우한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1972년 선종(善終)해 지금의 포항성모병원 묘원에 영면(永眠)했다.
필자는 남 신부가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생을 마감하며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의 한국사랑, 포항사랑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포항시는 이 같은 남 신부의 사랑에 보답하며 ‘포항을 빛낸 인물 8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필자는 남 신부의 생을 되짚어보며 시기별 활동과 업적에 대해 조심스럽게 글을 써 내려가고자 한다.
◇제1기-탄생에서 선교를 떠나기 까지(1895~1923)
남대영 신부는 1895년 6월 13일 프랑스 노르망디지방 빠리니(Parigny)에서 아버지 레옹 델랑드와 어머니 빅토린 르쿠틸렌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가난했지만 특별한 사랑을 베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남 신부는 1919년 10월경 구탕스 교구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해외선교에 뜻을 두고 있었던 남 신부는 192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이듬해인 1922년 사제서품을 받고 1923년 6월 5일 한국교회에 파견됐다.
◇제2기-선교 생활의 시작에서 ‘삼덕당(三德堂)’ 창립 전까지(1923~1934)
남 신부가 한국에 파견된 시기는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강탈해 통치하던 시기로 많은 한국인들은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하던 때다.
그는 입국한 해 12월경 경북 칠곡군 가실성당(현 낙산성당)의 보좌 신부, 이듬해 부산진성당(현 범일동성당) 본당신부를 역임했다.
차츰 활동 영역을 넓혀가던 중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지면서 1933년 본국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수도회 ‘삼덕당’을 창립하기 전인 1934년 4월경 영천군 화산면 용평본당 신부로 부임해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무료 진료소를 개설해 의료사업을 시작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제3기-삼덕당 창립과 왕성한 활동기(1935~1965)
1935년 12월 8일 남대영 신부는 예수성심께 자신을 봉헌할 것을 결심한 6명의 용평본당 동정녀들의 서원을 받아들여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남 신부는 이들을 ‘삼덕당’이란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삼덕당은 오늘날 ‘예수성심시녀회’의 모체가 됐다.
또 밤새 거리에서 생을 달리할 뻔한 할머니를 모셔 함께 지냈고 나환자였던 어린 두 자매를 데려와 돌보게 됐는데 이 사건들은 오늘날 ‘성모자애원’이라는 사회복지사업의 동기가 됐다.
남 신부와 삼덕당 가족들은 1950년 포항 영일만의 송정 바닷가(현 포스코공단)에 터를 잡고 영아원, 보육원, 양로원, 무료진료소, 성당 등 35개동을 건립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하의 시달림과 한국전쟁의 민족 수난을 수도회와 함께 겪고 견디며 본국이 아닌 이곳 한국, 포항에서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일궈 불우한 이들과 함께 시련을 극복해 나갔다.
‘포항예수성심시녀회’는 1952년 9월경 대구 대교구소속 수녀회로 정식 인준을 받았다. 또 1963년 회헌을 승인받아 같은해 9월 13명의 수녀들이 첫 종신서원을 했다.
◇제4기-은퇴 그리고 지역사회복지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다
1965년 3월경 첫 총회를 거쳐 모든 사업체를 수녀들에게 인계했고 같은해 12월 모든 사업체에서 은퇴하며 오천 갈평리에 머물게 됐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제2의 성모자애원을 만들어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그리고 1967년 7월경 정부가 송정 바닷가 일대를 포항종합제철소 부지로 선정하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성실히 협조하며 20년간 삶의 터전 뒤로 한 채 700여명의 대가족은 지금의 대잠동 성모병원 부지로 이사를 오게됐다.
포스코는 지난 2020년 5월 20일, 포항제철소가 건립되던 당시 자발적인 이주로 지금의 포스코를 있게 한 예수성심시녀회를 기리고자 3고로 공장 앞에 입간판을 설치했다.
남 신부는 대잠동으로 이사를 오면서도 그의 활동은 식을 줄 몰랐다.
포항 성모자애원과 예수성심시녀회 설립으로 현대 사회복지사업의 선구적 역할을 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고 1969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최고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1990년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수여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수원가톨릭대 한민택 교수는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레지옹 도뇌르 최고 훈장 수상에 대해 “남 신부는 죽어서도 잊히지 않고 진정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라며 “남 신부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상관없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 그 이유에 대해서 남 신부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온 삶을 바쳐 그들을 모으고 돌봄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한 교수는 남 신부의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던 삶을 되뇌며 이 사회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하며 남 신부의 발자취를 회고했다.
이처럼 남 신부는 한국사회가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타지에서 헌신하며 1972년 11월 17일 선종했다.
◇남 신부를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남 신부에 대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선교사로 못 다한 사랑을 다하기 위하여 포항 대잠 언덕에 잠들어 계신다.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 떠나갔지만 그의 숭고한 사랑의 정신은 예수성심시녀회 수녀들에게 계승되어 오늘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감사의 삶을 몸소 실천하시고 그 정신을 후대에 길이 남기신 신부님의 정신은 감사운동을 통해 인성교육도시로서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있는 시정의 방향성의 근원이 됨을 상기하고자 한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자서전에서
한편 남 신부와 가족들이 척박한 토지를 개간하고 지역사회에 헌신했음에도 최근 안타까운 일이 벌어질 뻔했다.
김알로이시아 예수성심시녀회 원장수녀는 “얼마 전 수녀원 주변으로 아파트가 들어선다며 아파트와 공원 공사가 남 신부께서 잠든 묘원까지 영향을 끼칠 뻔 했다”며 “수녀원 관계자들과 포항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보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포항시가 포항을 빛낸 인물이라 평가하면서 인물의 발자취와 흔적을 관리·보존하는 것에 대해서는 등한시한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의 시간을 가져봤다.
다시금 올해는 남대영 신부의 한국 입국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로 남 신부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을 되뇌며 앞으로 100년을 우리 포항시민이 남대영 신부를 기억하고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