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작은 농촌도시 윌로스 근교 벌판. 1920년 2월 20일 이곳에서는 대한민국 공군사의 첫 페이지가 쓰였다. 우리나라 공군의 뿌리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 공군사관학교인 한인비행학교가 문을 연 것이다.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 주역은 노백린 장군이다. 그는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성격도 호탕해 무인 기질을 보였다고 한다. 1895년 관비(官費)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東京)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와 세이조(成城)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했다. 1900년 10월 귀국해 대한제국 장교가 된 뒤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 연성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국운이 기우는 나라의 군인이었으나 기백만큼은 꼿꼿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 고관들을 초청해 베푼 연회에 참석해 이완용·송병준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 것을 발견하자 '일본의 개'란 뜻으로 "워리 워리"라고 불렀다. 이 말뜻을 알아듣고 격분한 일본의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가 칼을 빼들고 덤비려 하자 노 장군도 이에 맞서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 뒤 안창호 등이 만든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했다. 1910년 한일 강제합병이 되자 식민통치에 협력하라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뿌리치고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군단의 별동단 주임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시보를 창간해 독립정신 고취에도 나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추이를 관심 깊게 지켜본 노백린은 "앞으로 공군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예견하며 "독립군도 비행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열정과 탁견에 감복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총무 곽임대는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매달 600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노백린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정 군무총장을 맡았다.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가 곽임대 주선으로 재미동포 김종림을 만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때부터 비행학교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또 다른 주역 김종림은 1886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으나 국운이 기울고 흉년이 겹치자 1906년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이민한 뒤 이듬해 캘리포니아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철도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가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다. 생업에 바쁜 가운데서도 공립협회에 가입해 공립신보 발간에 참여하고 국민회 법무원과 흥사단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농사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전쟁 특수 덕도 톡톡히 봤다. 소득의 90%를 지주가 떼가는 관습법 속에서도 한 해 3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미국 신문은 그를 '쌀의 왕'(Rice King)이라고 소개했다. 그 돈으로 임정에 거액의 후원금을 보내는가 하면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인쇄기 구매 자금도 기부했다.

노백린을 만나 비행학교 설립 자금으로 2만 달러를 지원한 뒤 매달 3천 달러씩 운영자금을 대기로 했다. 현지 신문 '윌로스데일리저널'은 1920년 1월 19일자 1면 머리기사로 "쌀농사로 부자가 된 한국인 김종림이 한인 청년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치기 위해 비행장을 설치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활주로를 만들 16만2천㎡의 부지를 확보했으며 교사(校舍)로 쓰기 위해 2년 전 폐교한 퀸트학교도 사들였다. 교관 1명과 정비사 2명을 채용하고 학생 15명도 모집해놓았다.

신한민보 3월 19일자는 "노백린 각하가 경영하는 윌로스 비행학교에 나아가 비행술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학생은 건장한 청년 24명"이라고 보도했다. 첫 비행기를 들여온 6월 22일에는 학생이 30명으로 더 늘었다. 7월 5일에는 동포 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정식으로 개교식을 열었다. 미국인 수석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시범 비행을 선보였다.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가 된 한장호·이용선·이초·오림하·장병훈·이용근 등도 교관으로 합류해 후배들을 지도했다.

이런 움직임을 일제가 놓칠 리 없었다. 미국의 일본 정보원은 한인비행학교 운영 현황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올렸다. 9월 9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였다. 그 가운데는 미국 항공대의 최첨단 훈련기인 스탠더드 J-1 기종도 있었다.

윌로스 한인비행학교는 세 차례에 걸쳐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비행기에는 태극 마크와 함께 대한민국항공대(Korean Air Corps)의 영문 약자로 추정되는 'K.A.C'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운영 시스템과 커리큘럼도 체계화해 상급 기관으로 비행가양성사를 신설했고 학생들에게는 조종술뿐 아니라 정비, 무선통신, 군사학 등도 가르쳤다.

그러나 독립군 비행사들을 앞세워 도쿄 공습에 나서겠다는 노백린과 김종림의 꿈은 1년여 만에 좌절되고 만다. 1차대전 종전으로 곡물 특수가 사라진 데다 1920년 말 캘리포니아주 전역에 대홍수가 일어나 김종림의 농장이 파산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운영비 지원이 끊어져 한인비행학교는 1921년 4월 문을 닫았다. 한인비행학교 학생인 박희성 등 3명이 조종사 자격시험을 보다가 기체 사고로 추락해 중상을 입는 불행도 겹쳤다.

그 후로도 노백린과 김종림은 비행학교를 재건하려고 노력했으나 자금난과 일제의 방해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노백린은 임정으로 돌아와 국무총리로 활약하다가 1926년 1월 22일 중국에서 숨을 거뒀다. 평소 입버릇처럼 말하던 "독립군 군복을 입고 남대문으로 서울에 입성하고 싶다"는 꿈을 못 이룬 것이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종림은 1973년 숨졌고 2005년 애족장을 받았다.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가 임정 독립군 장교로 활약했다. 중국과 일본의 비행학교를 졸업한 한인 비행사들도 독립투쟁에 가세한 뒤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됐다. 지난해 10월 창군 70년을 맞은 대한민국 공군은 세계 굴지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노백린과 김종림은 비록 생전에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이 알찬 열매를 맺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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