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문 한동대학교 교수

자기 조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는 드물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집안 내력에 관심이 많아 족보들을 지니고 선산을 잘 가꾸고 있다. 한반도에 수천년 몰려 살다 보니 대부분 결혼을 통해 엮어져서 집안들 간에 형질의 차이가 잘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필자의 한 대학 친구는 그 당시 몇 년간의 노력을 거쳐 사람들의 성씨를 80~90% 맞히고, 나중에는 일년 중 몇월생인지도 잘 맞히게 되었다는데, 이 친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사도 아니고 그냥 뛰어난 학식과 언변을 지닌 학생이었다.

과거 한반도에도 북방의 다양한 족속들이 다양한 시기에 한반도에 유입되었기에 잘 관찰해 본다면 각 집안의 형질이 좀 나타나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학문명이 발달되고 삶의 질이 향상된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과거에는 집안형편이나 몇월생이냐에 따라 성장환경이 크게 다를 수 있기에 좀 차이가 보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각 집안보다는 우리 한국인의 형질이 다른 민족들과 차별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만 해도 아버지는 구(具)씨이며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할머니는 김(金)씨이며 외할머니는 민(閔)씨였다.

이렇게 뒤섞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부계혈통을 중요시하며 족보도 부계를 따라 이어져 오고 있다. 족보가 집안의 가보처럼 내려오고는 있지만, 실제로 족보가 간행된 것은 이조 중기이다.

그때 가장 먼저 족보를 편찬한 집안이 너덧 정도인데 그중 하나가 능성 구씨 집안이다. 대부분 집안의 족보들은 이조 중기 이후 말기에 만들어졌고, 많은 이들의 성도 그때 얻게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800~900년도 아니고 2,000년의 역사를 지닌 집안들은 족보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구전되어 오거나 여기저기의 기록을 찾아 힘들게 엮어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능성 구(綾城 具)씨의 경우에도 고증이 쉽지 않아 족보에도 혼동이 있다. 우선 태봉국 신하였던 구진(仇鎭)이 고려 태조 왕건의 신임을 받아 구(具)씨 성을 하사받고 왕건이 지키고 있던 전략요충지인 나주(羅州)로 파견된다.

같은 시기 능성 구씨 선조인 구존유(具存裕)가 고려의 17번째 개국공신으로 나타나는데, 같은 인물 같지만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 300년간 기록이 끊어지고, 사실상 중시조인 선조가 같은 이름으로 고려중엽에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구씨 성(具, 仇)은 그 이전인 삼국시대며 후삼국시대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로 인한 구씨 선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편이다.

몇 년 전 필자가 신문칼럼에 구씨의 선조는 부여계인 금관가야의 구해왕(仇亥王) 일족이 아닐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는 성이 크게 정착된 시기도 아니었지만, 이들 집안은 대부분은 신라로 가 김(金)씨가 되고 일부는 남아 구(仇)씨로 살았다.

후삼국시대 쯤에는 한자의 뜻이 바뀌어 의미가 이상해져 일부 구씨들이 구(具)씨로 바꾸어 쓰기도 했고, 왕건이 구(具)씨를 쓰도록 사성(賜姓)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분이 선조로 모셔진 것 같다.

그로부터 300년 후 중시조격인 족보상의 선조는 중국에서 대학자인 주희(朱熹)의 손자 청계 주잠과 함께 귀국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분이 고려초 선조와 이름이 같은 것이다. 이때부터 착오가 생긴 것인데, 엄밀히 정리한다면 후삼국/고려초 선조는 선계(先系)선조이며 고려중엽 중시조가 실제적인 족보상의 선조라고 보아진다.

이런 상황이 다른 성씨에서도 발견된다. 포항시 흥해읍에는 곡강 최(曲江 崔)씨 문중이 있는데 이들은 경주 최씨 일족으로 고려 때 유명한 무신집안이었고 그 당시 분파한 곡강 최씨의 선조묘도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300년 정도 역사가 끊어지고 중시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지역 곳곳에 이 집안 소유의 전답과 선산도 많고 이 시기에도 분명 살아 명맥을 이어 갔을 것이지만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해 추후 족보를 만들 때 그런 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데, 능성 구씨 가문에서는 이를 아직 정리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요즈음 구씨의 선조에 관한 또 하나의 이론이 ‘나무위키’ 등을 통해 역사가들이 제기하는 의견이다. 백제에 대성8족(大姓八族)이 있었고 그 중 강력한 중앙귀족들이 해씨(解氏)와 진씨(眞氏, 眞募氏)였다.

백제가 망한 후 일부는 중국으로 끌려가고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보는데, 일부는 고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꾼 경우가 많았고, 그 예가 능성 구(具)씨로서 진씨의 변형된 성이라는 것이다.

그때는 한글이 없어 한문을 차용해 쓰던 때이고 진이라는 성도 발음을 좀 달리했을 것으로 보는데, 그 원래 성의 일부 형상이라도 남겨두려 그리 했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통일신라며 후삼국시대에 과거 백제지역에 이 같은 구씨 성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그 이유라고 했다.

그러므로 능성 구씨의 기원도 ①부여계인 금관가야의 구해왕, ②예족 계통인 백제의 진씨 가문, ③중국에서 온 청계의 사위로 다양한데, 이들 중 하나가 옳을 수도 있지만, 이들 중 2개나 3개가 함께 옳을 수도 있다고 본다.

중시조가 신안 주씨 청계의 사위로 중국에서 왔지만, 중국 측 사료에 따르면 그는 고려인이었고 이미 구씨 성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족보 발행 당시 모화사상이 강해서 신안 주씨의 딸이 능성지역의 구씨 청년에게 출가했는데도 중국에서 온 것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그 당시 구씨들이 전국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었다고 보는데, 그중 가장 큰 집성촌이 나주/화순 인근 능성에 있었다. 그런데 피난 온 중시조 집안이 그곳에서도 그리고 추후 경기 광주, 충남 당진, 경북 성주 등으로 이주해서도 고려와 이조를 거치며 가장 번성했고 능성 구씨의 족보도 이 집안 중심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아진다.

그 전후에 많은 구(具)나 구(仇)를 쓰던 분들이 능성 구씨로 통합되었을 것으로 보아진다.

저작권자 © 영남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