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아오자이에 핀 무궁화<21>-아빠가 애비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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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연재】아오자이에 핀 무궁화<21>-아빠가 애비일 때
  • 영남경제
  • 승인 2020.09.1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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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주 작가
“오늘 화제는 소방관이냐?”

소장님은 빙그레 웃었다. 소장님이 카메라를 맨 채로 관찰로에 들어서면 별안간 한가해 보인다. 식물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작가 같다. 꽃을 찍으려고 땅에 엎드리다시피 하거나 곡예사들처럼 몸을 유연하게 비틀며 꽃에 카메라 렌즈를 맞출 때는 학자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예술가만 남곤 한다. 가끔은 소장님 흉내를 낸다고 두극이도 한껏 몸을 낮춰보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가 무섭게 얼른 일어나선 누가 보았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일쑤다. 그 학자며 예술가가 쉼터에서 두극이 곁에 앉아 있을 땐 그냥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가 된다.

“소장님, 산불이 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산불이 나더라도 아무도 죽지 않게 하고 싶어요.”

“기특하다, 두극아. 위험하고 힘든 일이거든. 아빠 때문이야?”

두극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극아, 얘기 하나 해 줄까?”

침묵을 깨려는 듯이 소장님의 목소리가 대나무처럼 꼿꼿했다.

“산불과 싸우려면 소방관이 아니라 산림청 직원이 되어야 해. 헬리콥터에 산림청이라고 적힌 거 봤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불은 언제나 소방서와 연결된다고 생각해 왔다.

“살림청……요?”

살림은 할머니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할머니 친구들이 집에 온 날이면 할머니는 곧잘 살림이 헤프다는 둥, 살림하는 이가 손이 너무 크다는 둥 하며 엄마를 나무라곤 했다. 살림이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상한다. 그 살림이 헬리콥터에 왜 새겨져 있다는 말인가. 살림을 중얼거리며 혼란스러워진 두극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소장님을 올려다보았다.

“산 산, 수풀 림, 관청 청. 산이나 숲과 관계가 깊은 행정 기관이야. 책에서 본 적 없어? 불이 나는 지역이 산이라서 산과 나무를 잘 알아야 되거든.”

“어, 산 림 청이었구나.”

그제야 살림이 아니고 산림이었구나 싶다. 식물원 책에서 종종 만난 산림청이건만 산림이 아니라 살림이 떠올랐다.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어른들처럼 살림이 먼저 떠오른 자신이 우습다. 살림도 [살림]이고, 산림도 [살림]이다. 한국에서 자란 두극이도 혼란스러운데 엄마는 어떻게 한국어를 공부했을까. 새삼스럽게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아빠도 대단하다. 베트남 사람인 엄마는 한국어도 잘한다. 한국 사람인 아빠는 베트남어도 잘했다. 잠시 엄마, 아빠 생각에 빠져 있던 두극이의 눈에 낯익은 신발이 들어온다. 아차, 지금은 소장님과 함께 있지, 얼른 소장님을 바라보았다. 소장님의 눈빛에서 1월에 남 먼저 꽃이 피는 납매처럼 좋은 냄새가 난다.

소장님은 두극이가 산림을 살림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굳이 산림청의 음과 뜻을 설명한 걸 보면.

“우리는 지금 산림청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려는 게 아니고 산불 얘기를 하고 있지?”

“소장님, 우리 아빠가 많이 뜨거웠겠죠!.”

두극이가 진저리를 쳤다.

“두극아, 산불을 발견하면 보통은 도망을 가게 되거든. 난 아빠가 산불이 번지는 걸 막으려다가 불길을
피할 시기를 놓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장님의 강의가 시작될 즈음이다. 소장님은 가벼운 농담보다 진지한 얘기를 더 좋아한다. 청중이 많든 적든 따지지 않는다. 청중이 초등학생이든 식물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든 가리지도 않는다.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사용하는 어휘가 조금씩 달라질 뿐, 내용은 같다. 청중이 중고등학생이면 식물 세계를 곧잘 인간의 세계와 비유하기를 즐겨한다.

“두극이 네가 추측한 걸 먼저 말해 봐.”

이것도 소장님 방식이다. 소장님은 언제나 두극이의 생각을 먼저 물어본다.

“산불을 발견했을 때 그 면적이 아빠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을 거예요. 불을 끌 물이 없어 나뭇
가지나 등산화를 이용하지 않으셨을까요.”

두극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하면서 소장님을 바라보았다. 소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뭇가지나 등산화가 아니고 보통은 등산복을 벗어서 불을 끄려고 한다더구나.”

엄마는 아빠가 등산복을 입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두극이에게 말한 적이 없다.

“아, 예. 아빠가 열심히 불을 껐지만 불은 점점 거세어졌어요. 아빠는 남의 일이라고 대충 하는 법이 없거든요. 이젠 아빠가 도망을 가야 할 차례지만 아빠는 힘이 없어서 달릴 수가 없게 되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만…….”

“두극아, 아빠는 힘이 있었어도 도망가지 못하셨을 거야.”

“무슨 뜻이에요? 근처에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아빠를 도망가지 못하게 했을까요?”

“아니, 두극아. 사람이 도망 못 가게 한 게 아니고, 나무가 그렇게 했을 거야.”

“나무가요? 어떻게요?”

소장님이 나지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잠자리에서 들려주던 목소리처럼.

흔히 화재를 화마라 하고, 이 불마귀가 쫓겨난 후의 모습을 화마가 지나간 상처라 한다. 산불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상처는 어마어마하게 크기 마련이어서, 누구네 집이나 누구네 과수원 정도가 아니고 국가적 재난이 되어 버린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는 50년에서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산불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산에 소나무가 많은 것이 좋은 일이 못돼. 소나무 한 종류만 있는 단순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소나무가 이롭지 않은 나무예요?”

“그런 뜻은 아니지만, 산불 얘기만 하면 그래. 침엽수림에 산불이 잘 나거든. 산불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거의 없어. 사람들이 실수를 하거나 일부러 불을 지르는 거지. 땅 표면에서 난 불이 수관화로 발전하면 끄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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