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주 작가

다케시마라는 낱말은 한참 동안이나 엄마와 두극이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본에게 분노하고, 일본을 규탄했다. 흥분해서 열을 올리던 엄마가 갑자기 발을 멈추었다. 마구 떠들던 두극이가 엄마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초였다.

처음 식물원에 다녀왔다고 하던 날 엄마가 바나나 이야기를 했었다. 식물원에서 바나나를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노라고. 하지만 엄마가 본 것은 바나나가 아니고 파초였다. 파초라는 이름표를 못 본 모양이었다. 엄마는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어김없이 바나나였으니까. 이렇게 추운 지방에서도 바나나가 자랄 수 있다는 생각에 반갑기만 했다. 어떻게 그 정도로 착각할 수 있을까, 소장님에게 물어보았더니 파초와 바나나는 한 집안이기 때문이라 했다. 집안이란 건 참으로 신기하다. 베트남에 가서 이모를 볼 때도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엄마 생각이 베트남으로 날아갈까 봐 얼른 엄마 손을 잡고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엄마, 이곳이 식물원에서 제일 따뜻한 곳이잖아? 대나무 숲이 바람을 막아주니까.”

“그래서 아열대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며!”

“아열대원이라서 여기엔 상록수 종류가 많아. 봐, 엄마.”

“벤 끅, 붉가시나무니 종가시나무니 하는데, 왜 가시가 없는 거야?”

“가시라는 말은 열매를 뜻하기도 한대.”

“소장님 말씀?”

“응, 인터넷 자료를 주셨어.”

또 소장님 덕이다.

“내가 혼자 알아낸 것도 있어, 엄마.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 때 이 가시나무를 사용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거든.”

“그래? 이 나무가 단단한 모양이지?”

“응, 참나무 종류가 제일 단단한데, 그 중에서도 가시나무는 더 단단하대.”

가시나무와 어울려 있는 아왜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에 물기가 많고 잎은 불꽃이 나지 않아 불에 강한 나무라 한다. 그럼 산마다 아왜나무를 심으면 산불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나무라는 걸 잊고 한 말이었다. 두극이가 잠시 아왜나무를 생각하는 동안 이번엔 엄마가 앞장을 섰다.

식물원의 아열대원 다음에는 용연지가 나타난다. 이곳을 지날 때 즈음이면 다리쉼이 필요한데 때를 맞춰 쉼터가 보이는 것이다. 쉼터로 올라가는 길에 ‘그리운 아버지의 자리’라는 안내문이 있다.

원장님이 어린 시절부터 탐내던 땅이었는데, 나이가 들어 오랫동안 땅을 사려고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던 것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이 자리에서 너털웃음을 웃는 모습으로 꿈에 나타난 그 날, 땅주인이 스스로 땅문서를 가지고 팔려고 왔다 했다. 따뜻하고 시야가 좋은 명당자리라 이곳에 집을 짓고 살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마련되는 것을 보니 그게 또한 하늘의 계획이고 아버지의 뜻인 듯하다는 내용이다.

엄마도 이미 읽었을 텐데 꼭 처음 보는 것처럼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추석이어서 엄마도 엄마의 엄마가 보고 싶은 거다. 아니, 말을 아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말이 있다. 추석이어서 친척들이 많이 몰려왔다가 가니 아빠가 더 보고 싶어진 모양이다. 사실 두극이도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다.

두극이가 먼저 벤치에 앉았다. 여름이 막 시작될 때 연한 보랏빛 꽃이 피어 하늘을 수놓던 멀구슬나무를 바라보았다. 꽃은 지고 열매가 꽃처럼 달려 있다. 말없이 멀구슬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엄마가 두극이 옆에 앉았다. 엄마와 두극이는 한동안 수련을 보고 있었다. 두극이는 물 수(水)를 쓰는 것이 아니고 잠잘 수(睡)를 쓴다는 수련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눈앞에 있는 수련을 바라보고 싶었다. 수련 주위에는 창포가 가득했다. 부들처럼 생긴 창포꽃도 생각했다.

“벤 끅, 아빠 따라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맞이한 명절이 설날이었거든.”

역시 그랬다. 엄마는 설날 얘기를 끄집어냈지만 도민 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새해를 맞이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리엔을 매우 놀라게 했다. 해 뜨는 모습을 보려고 움직이는 엄청난 자동차 물결은 한국이 얼마나 풍요로운 나라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단지 해가 뜨는 모습을 보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모여든다는 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명절이라며 떠들썩하긴 했지만 설날은 참 허망한 날이었다.

리엔은 울산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들뜬 마음으로 청하로 향했다.

시집에 도착하니 서울에 사는 동서네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몹시 분주했지만 리엔은 뭘 해야 하는지를 몰라 앉았다가 섰다가 마음만 바빴다. 리엔이 시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빨리 한국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예, 어머니.”

리엔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동서네가 도착했다. 길이 막혀서 늦었노라는 식구들의 모습에 고단함이 역력했다. 리엔이 놀란 것은 다음날이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겨우 밥 두 끼를 같이 먹었을 뿐이다. 서울행 승용차에는 시어머니가 챙겨주는 갖가지의 농산물이 바리바리 실렸다. 오후가 되자 시누이 식구들이 왔다. 어수선한 가운데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밥을 먹고 나자 다들 제 사는 곳으로 떠났다.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명절이었다. 전날은 음식 한다고 바쁘고, 다음날은 차례를 지내고, 한복을 입고 절을 하는 것. 그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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