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주 작가

시집 식구들과 먹은 음식이 리엔의 입에 맞지 않았을 것이라며 도민 씨가 리엔을 위해 ‘반미(베트남 식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도민 씨 곁에 온 것이다.

말이 먼저지 음식은 나중이라고 했던 도민 씨와 한 한국에서의 첫 나들이는 장보기였다. 리엔이 혼자 외출하기도 힘들고 평일에는 도민 씨의 퇴근이 늦어 한 주간 먹을거리를 미리 사 두어야 한다고 했다. 도민 씨가 베트남에 있을 때 먹었던 요리를 생각하여 한국에서도 만들 수 있는 베트남 음식 목록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

“퍼(베트남 쌀국수).”

도민 씨가 속삭였다.

“팃코쯩(돼지고기 조림).”

이번엔 리엔이 말했다. 도민 씨가 베트남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다.

돼지고기, 닭고기, 달걀, 당근, 파, 마늘……. 쌀국수 대신 밀가루국수나 당면이 등장했어도 참을 수 있었다. 요리에 단골로 들어가는 코코넛이 없어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하는 건 겨울이 가르쳐 주었다.

꿈꾸듯 말하던 엄마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벤 끅, 우리 이번 주말에 죽도시장에 같이 갈까?”

“왜 엄마?”

“어물은 죽도시장이잖아. 할머니 드리려고.”

죽도시장은 전통 시장이다. 엄마가 할머니 핑계를 댄다고 모를까. 두극이도 외할머니를 따라 베트남 시장에 가 본 적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방을 나갔을 때 두극이는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베트남과 조금이라도 더 닮아서 전통 시장을 찾겠지만, 죽도 시장에 가면 개복치를 볼 수 있어서 기대가 되었다.

주말을 기다려 죽도시장으로 갔다. 잔뜩 기대를 했는데 개복치는 없었다. 개복치를 못 보니 뭘 봐도 활기가 없다. 따분하고 심심했다. 뭘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없어서 이리저리 눈길을 주었다.
고래 고기.

두극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식당 간판에 적힌 ‘고래 고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것도 포항 수협에서 지정한 식당이라고 적혀 있다. 그 때부터 두극이는 엄마가 돌아가자고 할 때까지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엄마, 베트남에서는 고래 고기를 안 먹는댔지?”

“줄곧 말이 없더니. 또 고래 생각한 거야?”

“죽도시장에서 고래 고기를 파는 식당을 봤거든.”

두극이는 컴퓨터 화면에 고래 사이트를 펼쳐 놓은 채 물었다.

“고래 고기? 고래는 고기가 아니야.”

이건 또 무슨 뜻인가.

엄마는 한국에서 살아온 지가 15년째다. 그럼에도 문득 낯선 일이 생기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과 마주친다. 고래 뉴스를 볼 때도 그랬고, 오카리나 불 때 뱀이야 잡아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가볍게 말할 때도 그랬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동네 사람을 만나면 할머니는 어른 모실 줄을 안다며 엄마를 얼마나 칭찬하는지 모른다. 칭찬을 듣는 엄마와 야단을 맞는 엄마가 다른 사람이 아닌데. ‘다르다’는 걸 아직도 할머니가 모르고 있나. 인정하지 않는 걸까, 모른 척 하는 걸까.

인사성이 밝아야 한다며 인사성, 인사성이라고 노래를 하는 할머니다. 어른이 엉덩이만 떼어도 인사를 하는 것이 한국의 예절이라고 하도 강조하여 잠결에 아빠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어도 안녕하냐고 했다는 엄마이고.

메콩델타 생활은 이른 새벽 시간에 시작된다. 한낮은 덥기 때문이다. 아침은 가볍게 각자 알아서 먹는다. 점심은 모여서 먹는 수가 많은데 대체로 11시 경이다.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먹는 방법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베트남 가정에서 즐겨 먹는 팃꼬쯩이 그날의 중심 음식이면 거기에 씻은 야채를 곁들이고 밥통을 가져다 놓는다. 코코넛의 달고 진한 맛이 나는 팃꼬쯩은 돼지고기 조림이다. 찍어먹을 소스로 느억맘이 필요하다. 앞앞이 젓가락과 공기 하나면 밥상 차리기는 끝이다. 국물이 있는 요리면 공동 숟가락이 요리에 얹히고, 국물을 즐기면 숟가락을 사용하지만 대체로 젓가락만으로 해결이 된다. 오륙 명이 모여 먹어도 설거지는 순식간에 끝난다. 어질러 놓은 그릇 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이 남아도 걱정할 일이 아니다. 개와 고양이가 있다. 닭과 오리는 많다.

베트남에는 특별히 남자일과 여자일을 구분하지 않는다. 나물을 다듬거나 상을 차리는 일일 때 그 일이 굳이 여자일은 아니다. 밭에 나가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굳이 남자일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부엌과 관계가 있는 많은 일들이 온통 여자의 일이다. 주부들에게 명절이 반갑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엄마가 고래 얘기를 피하고 있다. 두극이의 혼란을 알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엄마 얘기에 끼어들었다.

“엄마, 고래 봤어?”

“아니, 못 봤어.”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호치민을 중심으로 미토만큼 떨어진 북쪽이었다. 내륙이었다. 거리로 따지면 포항에서 부산까지도 되지 않았지만, 도로가 변변찮아서 가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는 곳에 해변 도시 붕 타우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딱 한 번 붕 타우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붕 타우 해변에 거대한 고래가 와서 죽었을 때다. 수천 명이 몰려가 고래를 보았다. 고래 고기를 나누어 먹으려고 모인 게 아니라 죽은 고래를 제사 지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고래가 풍랑을 막아준 덕분에 배가 무사히 육지에 닿을 수 있어 목숨을 건졌다는 얘기가 수도 없이 많은데, 아무리 가난했지만 고마운 고래님을 먹을 수는 없었다. 제사를 지낸 후 죽은 고래를 땅 속에 묻어 살이 저절로 썩기를 기다린다. 3년이 지나면 살이 썩고 뼈만 남게 되는데 그 뼈를 거두어 사당에 모신다는 거다.

“사당에 모셔진 고래 뼈를 보는데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외할아버지는 그때의 감격을 두고두고 말했다. 수백 마리나 되는 고래 뼈가 모셔져 있었던 붕 타우에 다시는 가보지 못했지만, 고래 사당이 있다는 벤째라도 가보고 싶다고 가끔 소망을 말하던 외할아버지였다.

“엄마, 벤째에 가 봤어?”

“아니,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가보고 싶었어. 아빠와 같이 가려 했는데…….”

또 아빠 얘기다.

외할아버지가 제사했던 그 죽은 고래는 한국 동해안에서 내려갔을까? 예전엔 물 반 고래 반이었다는 인터넷 자료가 떠올라 뜬금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두극이는 뇌리에서 아빠를 몰아냈다.

“엄마, 내 얘기 좀 해 봐.”

아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어날까 봐 두극이가 얼른 말했다. 혼자 있을 때가 그리움을 달래기가 좀 더 쉬웠다.

- 반드시 한 줄을 띄워야 합니다.

두극이가 태어났을 때 막내아들이 손자를 안겨 주었다고 그리도 좋아하던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할아버지는 틀림없이 사내아이라며 아예 사내아이 이름을 지어놓고 기다렸다. 태몽이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노라며 식구들의 혹시 아니면 어쩌나, 하는 마음을 못마땅해 했다.

할아버지의 바람대로 사내아이가 태어났지만, 이름은 두극이었다.

두극(極). 두 개의 극이 조화를 이루면 하나의 태극이 된다는 엄마, 아빠의 소망을 담은 이름이었다. 베트남 이름으로는 두극(豆極)이 더우 끅. 두 쪽으로 갈라지는 콩이 하나로 합쳐진다고 ‘두’라고 했다나. 메콩델타에서는 녹두로 만드는 숙주나물을 즐겨 먹는다. 그래서 아빠가 ‘콩 두(豆)’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두극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할아버지라는 말도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빠는 할아버지가 미리 지어놓은 이름으로 두극이를 불러줄걸 그랬다고 마음 아파했다. 이름이 두 개인 사람도 흔한데 왜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안타까워했다.

- 반드시 한 줄을 띄워야 합니다.

엄마 목소리가 잠기고 있었다.

“엄마, ……이제 그만 말해.”

“아니, 괜찮아. 그때 아빠가 엄마 곁에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아, 또 아빠 얘기다. 아빠는 할머니의 아들이기 전에, 두극이의 아빠이기 전에, 확실히 엄마의 도민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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