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주 작가
도민 씨는 리엔을 보는 순간 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말했다. 리엔 역시 도민 씨를 보는 순간 그랬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신기하게도 도민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 딩(가족).
리엔은 도민 씨가 가족을 만나고 싶고, 알고 싶어 한다고 길게 설명했다.
틱(좋아하다).
껫혼(결혼).
도민 씨는 가족들 앞에서 그렇게 청혼을 했다.
- 반드시 한 줄을 띄워야 합니다.
하루 이틀 지나자 할머니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인자하고 다정한 할머니로 돌아왔다. 아빠가 사고를 당했을 때 엄마는 이삿짐도 챙기지 않고 두극이와 함께 황급히 할머니 집으로 왔었다. 한국 땅에서 아빠 다음으로 엄마와 가까운 사람은 할머니였다. 엄마가 할머니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 두극이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갑자기 아빠가 엄마와 두극이 곁을 떠난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낯설었다. 결국 이사는 모든 걸 이사전문업체에 맡겼다.
이사를 오니 할머니가 예전의 할머니가 아닌 때가 많았다. 처음엔 어쩌다 한 번, 그리고 가끔, 이제는 자주. 할머니는 생각지도 못한 일로 방바닥에 퍼질고 앉아 바닥을 치며 울었고, 엄마와 두극이를 원망했고, 마구 야단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할머니의 고함은 짧으면 몇 분, 길면 며칠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고함이 멎으면 너무도 다른 모습이라서 처음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 이웃집 할머니가 놀러온 것 같았다. 왜 할머니의 고함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서 풀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함치는 할머니가 진짜인지, 그렇지 않은 할머니가 그런지 그것도 잘 모를 지경이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자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다정하고 인자한 할머니 모습 때문이다. 그런 때의 할머니에겐 온갖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기 때문이다.
…….
아니다. 이건 일부러 찾아낸 이유다. 사실은 아빠가 엄마와 두극이 곁에 없다는 걸 아직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두극이는 할머니에게 다니러 온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엄마가 곧잘 두극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의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마치 아빠가 잠깐 출장이라도 떠난 것처럼. 두극이가 시무룩해 있을 땐 엄마가 옛적 얘기에 더욱 열을 올린다. 얘기 속에서 아빠는 도민 씨가 되어 버린다. 그런 때는 두극이의 아빠는 아니고 엄마의 도민 씨만 되는 것 같아 섭섭했다. 아빠 얘기를 할 때면 힘이 나는 엄마 모습이 참 보기가 좋은 건 또 무슨 일인가.
- 반드시 한 줄을 띄워야 합니다.
리엔이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때는 겨울이었다. 도민 씨는 당분간 베트남에 있다가 봄이 되면 한국으로 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도민 씨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던 리엔이 우겨서 택한 한국행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겨울 추위가 서둘러 한국에 온 리엔을 호되게 나무랐다.
도민 씨는 겨울 추위를 몹시 걱정하며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메콩델타, 덥다. 한국 겨울, 얼음.”
도민 씨가 리엔에게 얼음 속에 사람이 들어간 서툴기 짝이 없는 그림을 보여주며 겨울을 설명했다. 얼음을 채운 사탕수수 주스를 좋아하는 리엔이다. 그 차갑고 시원한 얼음 맛이란. 두꺼운 옷을 입고 얼음 같은 추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추위는 리엔을 기분 좋게 할 것이다. 눈이 내린다는 한국의 겨울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기어코 겨울에 한국으로 가겠노라 큰소리치는 리엔에게 도민 씨가 겨울옷을 보냈다. 처음 입어본 겨울옷은 무겁고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 한국의 겨울은 몹시 불편할 것 같았다. 한 계절 옷만 있으면 되는 메콩델타에서는 옷을 보관할 변변한 장롱이 없어도 괜찮았다.
한국으로 향한 리엔은 겨울을 맞이할 생각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한국 겨울, 얼음.
리엔은 두툼한 겨울옷으로 완전 무장을 했다. 이제 곧 차갑고 시원한 얼음이 찾아오리라. 그러나 한국의 겨울은 리엔에게 사납게 다가왔다. 혹독하게 추웠다. 금방 눈물이 흘렀다. 그 추위라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겨울옷을 금방 벗어버리기는커녕 얼굴도 손발도 겹겹이 감싸고 싶었다. 사무치게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부모 형제가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잖아.
아기를 가지면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누가 그런 걸 챙겨 주겠니.
음식이야 안 먹고 말면 된다지만, 그게 위안이고 힘이 될 수 있단다.
어머니는 리엔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자 그때부터는 머나먼 곳에서 마음을 달래는 법을 가르쳤다. 리엔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어려운 일은 도민 씨가 해결해 줄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우면 전화를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것으로도 안 되면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그만이다. 도민 씨는 해마다 베트남에 다녀올 수 있게 할 것이라 약속하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리엔의 혼인을 말리면서 했던 수많은 걱정을 제쳐두고 한국의 겨울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만들다니. 처음으로 어머니가 한 걱정거리가 구체적인 모습이 되어 속이 탔다.
“앰 하이 루온 어 벤 아잉 냐!”
도민 씨가 ‘항상 옆에 있어 주겠다’고 말했다. 몇 개의 낱말로만 대화를 했던 도민 씨의 베트남어가 문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민 씨가 마련해 둔 따뜻한 집도, 장롱에 걸려 있는 겨울옷도 이렇게 베트남어로 해주는 말만큼 힘이 되지는 않았다.
음식에 익숙해지는 것,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살림보다 중요한 건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야.”
도민 씨의 말에 이의를 갖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자 도민 씨가 연꽃을 예쁘게 그린 팻말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 Mừng đón Liên. 리엔, 환영해요!
영남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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