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주 작가

리엔이 한국에 온 첫 해는 오직 한국어로 말하기 위해 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어 배우기에 열중했다. 지금이야 울산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아랍어과가 생기고, 아산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는 베트남어과가 있는가 하면, 대학이며 도서관이며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애를 쓰지만, 리엔이 한국에 오던 때만 해도 베트남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어디 베트남뿐이랴. 미국인도 프랑스인도 한국어 배우기가 어려운 건 같을 거다.

서울과 부산의 어느 대학의 베트남어과가 한국어 배움 길을 여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도민 씨는 한국어를, 리엔은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도민 씨는 성조를 어려워하고, 리엔은 조사와 어미 활용, 그리고 발음이 어려웠다. 꽃을, 꽃과, 꽃잎을 왜 [꼬츨, 꼬꽈, 꼰닙]으로 소리를 내는지, 신라는 [실라]이면서, 횡단로는 [횡단노]가 되어 버려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깜 언 앰 다 전 아잉.(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도민 씨가 자주 그런 말을 했었다.

처음 도민 씨가 청혼을 하려고 고향으로 부모님에게 인사하러 오던 날, 도민 씨의 베트남어는 낱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베트남에 먼저 와 있던 회사 동료에게 급히 배웠던 것이다. 호치민에서는 리엔과 도민 씨 사이에 언제나 도민 씨의 회사 동료가 있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리엔이 먼저 고향으로 내려왔다. 도민 씨가 다른 병사들과 함께 찍은 군복 차림의 사진을 들고.

도민 씨는 리엔을 보는 순간 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말했다. 리엔 역시 도민 씨를 보는 순간 그랬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신기하게도 도민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 딩(가족).

리엔은 도민 씨가 가족을 만나고 싶고, 알고 싶어 한다고 길게 설명했다.

틱(좋아하다).
껫혼(결혼).

도민 씨는 가족들 앞에서 그렇게 청혼을 했다.

- 반드시 한 줄을 띄워야 합니다.

하루 이틀 지나자 할머니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인자하고 다정한 할머니로 돌아왔다. 아빠가 사고를 당했을 때 엄마는 이삿짐도 챙기지 않고 두극이와 함께 황급히 할머니 집으로 왔었다. 한국 땅에서 아빠 다음으로 엄마와 가까운 사람은 할머니였다. 엄마가 할머니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 두극이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갑자기 아빠가 엄마와 두극이 곁을 떠난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낯설었다. 결국 이사는 모든 걸 이사전문업체에 맡겼다.

이사를 오니 할머니가 예전의 할머니가 아닌 때가 많았다. 처음엔 어쩌다 한 번, 그리고 가끔, 이제는 자주. 할머니는 생각지도 못한 일로 방바닥에 퍼질고 앉아 바닥을 치며 울었고, 엄마와 두극이를 원망했고, 마구 야단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할머니의 고함은 짧으면 몇 분, 길면 며칠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고함이 멎으면 너무도 다른 모습이라서 처음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 이웃집 할머니가 놀러온 것 같았다. 왜 할머니의 고함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서 풀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함치는 할머니가 진짜인지, 그렇지 않은 할머니가 그런지 그것도 잘 모를 지경이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자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다정하고 인자한 할머니 모습 때문이다. 그런 때의 할머니에겐 온갖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기 때문이다.

…….

아니다. 이건 일부러 찾아낸 이유다. 사실은 아빠가 엄마와 두극이 곁에 없다는 걸 아직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두극이는 할머니에게 다니러 온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엄마가 곧잘 두극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의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마치 아빠가 잠깐 출장이라도 떠난 것처럼. 두극이가 시무룩해 있을 땐 엄마가 옛적 얘기에 더욱 열을 올린다. 얘기 속에서 아빠는 도민 씨가 되어 버린다. 그런 때는 두극이의 아빠는 아니고 엄마의 도민 씨만 되는 것 같아 섭섭했다. 아빠 얘기를 할 때면 힘이 나는 엄마 모습이 참 보기가 좋은 건 또 무슨 일인가.

리엔이 한국에 온 첫 해는 오직 한국어로 말하기 위해 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어 배우기에 열중했다. 지금이야 울산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아랍어과가 생기고, 아산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는 베트남어과가 있는가 하면, 대학이며 도서관이며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애를 쓰지만, 리엔이 한국에 오던 때만 해도 베트남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기가 무척 어려웠다. 어디 베트남뿐이랴. 미국인도 프랑스인도 한국어 배우기가 어려운 건 같을 거다.

서울과 부산의 어느 대학의 베트남어과가 한국어 배움 길을 여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도민 씨는 한국어를, 리엔은 베트남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도민 씨는 성조를 어려워하고, 리엔은 조사와 어미 활용, 그리고 발음이 어려웠다. 꽃을, 꽃과, 꽃잎을 왜 [꼬츨, 꼬꽈, 꼰닙]으로 소리를 내는지, 신라는 [실라]이면서, 횡단로는 [횡단노]가 되어 버려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깜 언 앰 다 전 아잉.(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워.)”

도민 씨가 자주 그런 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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