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주 작가

점심을 먹고 윤수는 공을 차러 운동장으로 갔다. 두극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생태 연못으로 갔다. 맨드라미가 눈에 띄었다. 강렬한 붉은 색이다.

“어머, 화마오가(hoa mào gà). 어머니, 화마오가 꽃을 좋아하세요?”

“화? 화, 뭐라고? 맨드라미 말이냐?”

지난해 가을, 마당 한쪽에 피어 있는 맨드라미를 보고 엄마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맨드, 라미요?”

엄마는 ‘맨드’는 낮게, 그리고 한 박자를 쉰 다음에 ‘라미’를 높게 끝냈다.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같은 꽃을 보고 할머니는 베트남어를 따라할 수가 없었고, 엄마는 한국어가 낯설었다.

“남자닭 머리에 있는 거 닮았잖아요, 화 마 오 가, 이 꽃이.”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엄마가 수탉 대신 남자닭이라고 했다.

“화마오? 어렸을 땐 닭벼슬꽃이라 했다.”

잊고 있었던 엄마와 할머니 생각이 났다. 맨드라미 얘기를 할 땐 엄마와 할머니 모습이 무척 정겨워 보였다. 할머니도 어렸을 적 얘기를 했고, 엄마도 베트남 외가 얘기를 했었다. 그게 할머니에겐 구수한 옛날이야기였고, 엄마에겐 그리운 것이었나 보다. 목소리가 그랬고, 얼굴 표정이 그랬다.

엄마와 할머니를 애써 잊고자 했다. 엄마 눈에 또 눈물이 맺혔을 것 같다. 뉴스를 보다가 고래를 먹느냐고 놀라는 바람에, 오카리나 소리를 들을 땐 뱀을 잡아먹자고 하는 바람에 야단을 맞는 엄마다. 엄마는 베트남 사람과 결혼하지 왜 아빠와 결혼했을까. 고래나 뱀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게 그렇게도 야단맞을 일인가. 툭하면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엄마는 왜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을까. 큰아빠, 큰엄마는 따로 잘만 사는데. 동네 할머니가 놀러 오면 엄마 칭찬 한다고 바쁜 할머니가 왜 자꾸 엄마를 울릴까.

왜,
왜,
왜?
엄마.

엄마를 불러보았다.

응웬 티 리엔(Nguyễn Thị Liên).

베트남 사람인 엄마 이름이다. 엄마는 베트남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국적도 베트남이다. 엄마는 한국어를 잘했다. 보통 사람들은 엄마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베트남 사람이라는 걸 알아채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엄마는 동네에서 베트남 새댁으로 통한다. 엄마야 여전히 국적이 베트남이니 베트남 새댁이라 해도 틀리지도 않았고 억울할 것도 없지만, 아이들이 한국 국적을 가진 두극이를 베트남 사람으로 대할 땐 기분이 묘했다. 아이들이 아빠를 보면 두극이를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할까.

아빠는 그렇게도 먼 베트남에서 엄마를 데려와 놓고, 그리고 두극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놓고, 어느 날 갑자기 엄마와 두극이 곁을 떠나버렸다. 너무도 갑자기. 엄마와 두극이는 허둥거리며 할머니 집으로 옮겨왔다.

처음엔 할머니가 엄마와 두극이를 몹시 반겼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다. 지금도 할머니는 엄마와 두극이를 좋아한다. 다만 느닷없이 할머니가 화를 내는 걸 감당하기 어렵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고 야단을 들을 때도 많다.

할머니가 놀러 가라고 해서 다녀온 두극이를 향해 방바닥을 치며 한탄을 했다.

“내 피가 섞인 손자 놈인데, 할미와 있는 게 싫어 여인의 숲인지 할매림인지 기어코 나갔다 오는 저놈 꼴 좀 보소. 동네 사람들아, 아들 잃은 몸이 손자 놈 저런 꼴까지 봐야 되겠소. 아이고,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내가 죽어야지. 아이고, 하늘님, 나 좀 영감한테 데려다 주소. 영감은 어쩌자고 날 안 데리고 가서 온갖 험한 꼴을 다 보게 하는고.”

할머니가 허락해서 다녀왔지 않느냐고 하면 말대꾸한다고 노여워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반항한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엄마 앞에서 웃으면 제 어미만 좋아한다고 하고, 할머니 보고 웃으면 비웃는다고 트집을 잡곤 한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처음엔 틀림없이 두극이를 야단쳤는데 어느새 그 야단을 듣고 있는 사람이 엄마로 바뀔 때이다. 할매림으로 달려가곤 하는 두극이를 할머니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엄마는 두극이를 말리지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 옆에 있어야 하는데, 할머니가 고함을 지르며 방바닥을 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몹시 괴롭다.

엄마와 할머니 생각에 울적해져 있을 때 땀범벅이 된 윤수가 다가왔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울적한 채로 집으로 갔다.

두극이가 침대를 정리하자 엄마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엄마는 가끔은 한국식으로 ‘잘 자라’고 말하고, 또 가끔은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밤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와 결혼한 거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막 문을 열고 방을 나가려는 엄마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엄마가 잠시 멈칫 했다. 엄마가 뒤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을 끄고 나갔다. 두극이는 침대에 누운 채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다.

두극이가 몸을 돌려 문을 등졌다.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 불빛 덕택에 이내 방안이 눈에 익숙해졌다. 손가락으로 벽에 마구 낙서를 했다. 처음엔 무얼 쓰고 있는지 두극이 자신도 몰랐다. 꼭 남의 손가락 같았다.
두극이는 아빠를 쓰고, 엄마를 쓰고, 베트남을 썼다.

엄마가 아빠를 만났을 때는 국제결혼이 요즘처럼 많지 않던 시절이라 결혼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결혼을 하고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를 몰라 겪는 어려움은 이미 각오를 했지만, 베트남에서도 남쪽인 메콩델타에 살다가 온 엄마에게 한국의 겨울은 견디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렇다고 여름이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니었다. 메콩델타에선 한낮을 지내기가 조금 어려울 뿐이다. 견딘다는 말이 필요할 만큼 더위가 심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의 여름은 하루 종일 밤새도록 더위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지금은 엄마라고, 에미라고, 올케라고, 제수씨라고만 불리지만, 엄마도 리엔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엄마를 자주 리엔이라고 부른 사람, 엄마가 누구누구 씨라고 부른 유일한 사람, 아빠. 도민 씨.
저작권자 © 영남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