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한국교수작가회 부회장

 

 

 

예플로 팬션은 오밀조밀 프로방스의 운치가 물씬 느껴지는 카페를 연상시킨다.

낮에 보았다면 저수지는 하늘빛 받은 은쟁반 같았을 것이다. 그 가장자리를 연하여 나무숲에 싸인 나지막한 동산. 몇 채의 기다란 목조건물은 저수지 쪽으로 넓은 전망 창을 달고 가파르게 들어서 있다. 초입에 있는 팔각형의 큰 침실 바로 밑이 중앙 홀이다. 큼직한 화덕 옆으로는 조그만 라이브 무대가 오밀조밀 꾸며져 있고, 홀 바닥에서는 흙과 풀과 돌이 함께 엉켰으며, 통나무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은 앉으면 바로 객석이 된다.

먼저 도착한 직원들은 술 파티를 벌이는 중이라서 얼굴에는 벌써 발그스름하게 노을이 번져 있다. 강화도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니! 오느라 애를 먹이긴 했지만 차츰 찾아온 보람이 느껴진다.

송년 모임이 있는 날. 서초동에서 강화도로 출발할 때는 이미 저녁 열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모임이 겹치는 바람에 가장 중요한 직원들과의 자리에는 늦어지게 되었다. 서울을 벗어나 제방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직원들로부터 방금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초행길이라도 한 시간이면 넉넉할 거리를 세 시간이나 걸려갔다고 하니 의아했으나 길 고생하고 찾아온 보람이 있다고 좋아라했다.

강화도 내륙에 있는 넓은 저수지를 끼고 돌자, ‘예플로’라는 조그만 나무 팻말이 갸웃이 나타난다. 좋은 곳은 늘 꼭꼭 숨어 있어서 찾아가기는 어려워 직원들이 늦어진 까닭을 알만했다. 대로에서 이탈하여 숲길로 들어서니 조붓한 비포장 길이 어둠 속에서 희끔하게 드러난다. 저수지가 나왔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밤길을 가노라니 빠져나가야 할 샛길을 두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결국에는 예플로 주인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야 했다.

직원들도 모두 만족한 눈치다. 새벽이 되면 저수지에 피어나는 물안개가 예플로의 백미라는 말은 감수성 많은 젊은이들을 더욱 달뜨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잔잔한 감동으로 몰아간 것은 예플로 주인 자신이었다.

삼십 대 같은 사십 대. 아담한 체구의 그는 구레나룻이 얼굴의 상당 부분을 덮고 있는 데다가 챙 넓은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처음에는 인상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모자챙 밑에서 반짝거리는 선한 눈동자와 입가에 흐르는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붙잡았다. 걸개그림 속에 들어앉아 무대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이국적인 용모는 더욱 호감이 간다.

그는 통기타를 어깨에 메더니 스스로 반주를 해가며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둘 넋을 잃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나이에 비하여 음색이 곱고, 구십 년대 풍의 멜랑꼴리한 노래를 어쿼스틱 기타 반주로 풀어내는 솜씨가 언플러그의 묘미까지 끌어내고 있다. 좋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으로부터 좋은 노래를……. 그는 이런 멋진 곳에서 표정으로, 노래로, 지난 며칠간 밤을 새워 일했던 직원들을 포근하게 감동시키고 있다. 무르익은 감성의 골로 음악이 찾아들자 모두 흠뻑 분위기에 취해 갔고 노래가 끝나자 늦은 시간이라 사양하는 그에게 간절히 앙코르를 청했다.

예플로 주인 부부는 노모 한 분만 모시고 이 외딴곳에서 살고 있었다. 비교적 작은 체구의 여주인은 몸이 좀 약해 보였다. 아이들이 몇이냐고 물으니 결혼을 할 때 아이는 갖지 않기로 했다고 대답하는 표정에서 묘한 여운이 감지된다. 어떤 사연이 그들 부부를 엮고 있을까. 혹 내가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진다면 그들이 살아온 사십여 년을 듣게 될 것이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 그런저런 사정을 더 잘 알게 되리라. 그리하여 우린 더 밀접한 인간적인 교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매 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그 연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로 좋아 보이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거리라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에 섞여들기 전 서먹할 때, 사람 사이에는 묘한 틈이 생긴다. 때론 그 틈새가 필요할 때도 있고 반면에 틈을 메워야 할 때도 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간의 틈을 밀접의 거리, 공통의 거리, 공중의 거리, 개체의 거리등 네 가지로 구분 짓는다. 밀접의 거리는 부부 사이와 같은 긴밀한 거리이고, 공통의 거리란 이념적 동질성이 전제된 거리로 우리라든지, 한겨레, 동포 등이며, 공중의 거리는 사회적인 규범상의 거리다. 국민이나 대중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체의 거리란 관계 설정이 전혀 되지 않은 타인과의 거리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각기 저마다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타인들과 어깨를 맞대어 걸어가고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름의 적절한 거리에서 나와 관계하고 있다. 적절한 거리란 타의에 의해 설정된 거리가 아니라 스스로 거리 두기를 인위적으로 설정하여 둔 거리이다. 무릇 너무나 가까운 것은 너무 먼 것 이상으로 본질을 외면할 우려가 있으니…. 다정도 병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어떤 거리를 설정하여 관계하느냐가 세상살이의 지혜라는 말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른 새벽에 저수지의 물안개가 피어나는 모습을 찍어 보았다며 박 실장이 디지털카메라를 열어 보인다. 솜털 같은 물안개가 수면에서 일제히 피어올라 산허리를 가물가물 지우고 있다. 이른 여명으로 모든 것들이 덜 깨어나 물안개 속으로 적당히 감추어져 있지만, 그 모습에서 새벽 향기가 더욱 짙게 배어 나온다. 모가 나는 모습을 가려주고 부드럽게 안아주는 자연의 포용력이 수심처럼 깊고 산세처럼 은근해 보인다. 안개가 걷히고 주변이 또렷하게 보일 때보다 물안개 핀 저수지의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를 자연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여명이 걷히고 금빛 햇살이 저수지 주변을 비춘다. 예플로 팬션에 하나둘 햇살 꽃이 피어난다. 풀명자 가지 위로 조르르 거리 둠 없이 햇살이 내려앉고 있다.





【꽃섬 읽기】는 '원종린 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한 박종규 작가의 글 세상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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